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인 Mar 22. 2023

유능해지는 법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올해 유난히 시끄러웠던 상반기 인사발령 때 나는 기존 면허행정 업무에서 과태료 업무를 새로 맡게 되었다. 설상가상 기존에 일했던 민원실 내 바로 옆자리로 옮겨져서 거의 매일 후임자에게 업무인계가 가능했던 반면, 전임자가 바쁜 곳으로 발령이 나서 정작 나는 내 업무를 인수받을 시간이 없었다. 급한 대로 매월 1회 실시하는 긴급차량(소방, 경찰) 과태료 면제 심사하고 검ㆍ교정 일정이 이미 경과해 버린 음주측정기ㆍ감지기 회수해서 택배 보내고 정신없이 선배님이 수차례 강조한 예금압류에 매달렸는데 이 과정에서 체납자들의 통장 압류와 동시에 민원전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치안성과 중에 '과태료 징수실적'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것이 내가 이 업무를 하면서 달성해야 할 과제이자 목표였기에. 전임자도 예금압류와 영치실적이 매우 중요(예금압류와 번호판 영치로 체납 과태료를 납부하면 징수금액에 2배를 성과로 인정)한데 내근이라 영치실적을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예금압류 무조건 많이 해야 한다며 어쩌다 구내식당에서 잠깐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내게 예금압류 잘하고 있냐고 안부처럼 묻곤 하실 정도였으니까.

비록 내가 지원을 희망했거나 남들보다 욕심을 내서 맡게 된 업무는 아니었으나 나는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인사발령 과정에서 기존 과태료 자리를 희망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그 직원의 자리를 뺏은 것 같은 미안함도 있었고 기존에 이 일을 했던 선배님이 업무적으로 인정(장려장 등 표창) 받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 선배님처럼 잘하고 싶다는 의욕도 있었다. 그래서 오자마자 근거법률(질서위반행위 규제법, 국세징수법 등)을 찾아 출력해서 책상에 붙여놓고 TCS, NICE credit 등 전산업무 절차라던지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일을 잘해보고 싶었다.

근거 법률과 절차를 충분히 검토했고, 이만하면 민원인에게 예금압류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적으로 날아든 민원인들의 반응은 날것의 '분노' 그 자체였다. 그들이 귀가 따갑도록 수화기 너머로 쏟아내는 반말과 고성을 동반한 분노폭격에 안타깝게도 내가 준비하고 있었던 '왜, 어떤 근거로 압류가 진행이 되었고 해결 가능한 방법들이 무엇인지' 따위의 답변들은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다. 왜냐고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들이 원한 건 결코 내 대답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것을 전화를 끊고도 한참 만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전, 오후,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전화로 내게 퍼붓는 거칠고 과격한 불만 민원을 받아내느라 벨소리만 울려도 내 신경이 곤두설 지경이었고 퇴근 후에도 한동안 그들과의 통화내용에 사로잡혀 주고받은 말들을 수 없이 혼자 곱씹으며 고민했다. 내가 뭐라고 말했어야 적절했을까. 퇴근하고 저녁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되뇌다가 문득 시어머니가 말씀해주신 한 일화가 떠올랐다.

시어머니가 최근 오른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아프셔서 수소문 끝에 잘 본다는 의사를 찾아가셨는데, 언제부터 발병했고 얼마나 아팠는지 같은 절절한 어머님의 통증 설명에는 시큰둥하더니 짧게 증상을 묻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며 의사는 매우 불친절했으나 약이 잘 들어서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용하기는 한데 어지간해서는 다시 가고 싶지 않다며 그 병원이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순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흰 가운 입은 의사의 모습에 흰색 교통근무복을 입은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했으니 문제가 될게 전혀 없다'는 취지의 내 답변에는 크나큰 오류가 존재했다. 민원인이 불편을 느꼈으니 그것이 일단 문제였던 것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그럼 이 약을 드셔라 하고 말을 잘라 보내고 치료됐으니 끝인 것이 아니라, 원인이 무엇이고 얼마나 아팠을지 환자 입장에서 공감해 주고 진심으로 쾌유를 빌어주는 의사가 진짜 좋은 의사인 것처럼. 민원인의 입장에서 나는 너무나 냉정하고 싸가지 없는 경찰관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병원이나 경찰서를 좋은 일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몸이 아파서 예민하거나, 신체적ㆍ경제적 피해를 당했거나 국가의 강제집행 대상이 되어 매우 불쾌한 상태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유로 민원인의 감정쓰레기통이 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내가 진정 이 일을 잘하고 싶다면 공정성, 전문성 못지않게 공감능력도 애써서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위 악성 민원인들을 이따금씩 상대하며 배운 게 있다면 '유능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내가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그릇이 큰,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


아, 나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작가의 이전글 오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