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보좌관 제의를 받다
특별한 민원인들, 그리고 감정노동
얼마 전, 어떤 민원인으로부터 진지하게 국회 보좌관 자리를 줄 테니 올 생각이 있냐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요, 당연히 콜이죠!" 하며 명랑하게 응수했다. 역시 박경장 님 성격 시원시원해서 좋다며, 믿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또 길어져버린 통화. 오늘도 방문민원이 와서 이만 끊어야겠다고 공손히 내려놓은 전화. 하지만 아쉽게도(!) 수화기 너머 그 민원인은 실제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경찰서의 소위 말하는 진상 민원인이었다.
작년부터 아동학대로 수차례 신고가 되어 우리 서에서 조사를 받던 현직 교사인데, 그 과정에서 우리서 직원들에게도 하나씩 악감정을 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경찰서 홈페이지에서 조직도라도 검색한 건지 돌아가면서 전화를 걸며 소속, 계급, 성명까지 대면서 하루에도 수차례 폭언을 하기 시작했다. 공집방(공무집행방해)으로 엮기에는 애매한 수준으로 나는 ㅇㅇ서 경찰관들을 다 찢어 죽이고 싶다는 식의 저주와 경멸을 일방적으로 퍼붓다 끊어버리는 전화. 언젠가부터 각 사무실에는 그녀의 전화번호 뒷자리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은 전화기가 늘기 시작했다. '받지 말 것!'이라는 메모와 함께.
경찰서의 모든 부서에서 전화를 고의로 받지 않는다면 그 전화는 누가 받을까? 정답은 바로 민원실! 민원실 직원들은 각자 본인 고유의 업무를 하면서(나의 경우에는 과태료, 번호판 영치, 차량 및 예금압류, 음주측정기ㆍ감지기, 결손처리 등) 경찰서 대표번호인 민원실에 걸려오는 다양한 용건의 전화도 받고 경찰서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방문 목적에 따라 안내한다. 심지어는 왜 ㅇㅇㅇ수사관이 전화를 안 받냐, 왜 시청에서 □□를 안 해주냐, 내 딸이 친자가 아닌 것 같다, 왜 법이 이따위냐 같은 처치 곤란한 민원까지.
우리 민원실 같은 경우 민원실장님이 솔선수범하여 최대한 걸려오는 전화는 빨리 받고, 하나하나 열과 성을 다해 '특이 민원'을 직접 상대하며 일단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는 그들에게 공감해 준 뒤, 그러면 우리가 선생님의 뜻을 해당부서에 전달해 드리겠다는 완벽한 마무리로 감정쓰레기통이자 마지막 하나 남은 소통창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는데 일종의 부작용이었는지 그 선생님(공무원이 민원인을 상대하는 정중한 호칭이자 실제 현직 교사인 그분)은 매일 같이 민원실에 전화를 걸어 민원실 직원들의 안부를 묻고, 주식이나 경제시장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전에 워낙 입에 칼을 물고 고성을 내지르던 분이라 어지간한 얘기는 이미 들어줄 마음을 먹었던 터. 눈과 손은 긴급차량 과태료 면제(경찰이나 소방이 신고 출동 중 속도위반이나 신호위반에 걸렸을 때 과태료를 면제해 주는 것) 기안을 올리면서 귀와 입으로는 아이고, 네, 저런, 힘드셨겠네, 하고 농담에는 웃어주면서 반년 정도 지나니 급기야는 한번 집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까지. 솔직히 더 이상은 저도 불편합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운을 떼려는데, 지금 학생ㆍ학부모들과의 소송으로 사표를 제출한 상태고 곧 수리가 될 텐데 총선에 도전하려고 한다며 당선되면 자기가 부르겠다고, 경찰관 때려치우고 올 의향이 있냐고 진지하게 묻는 그녀.
일단 당선되시고서나 전화를 주세요!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특히 마음이(정신적으로) 병들어 경찰서를 찾는 모든 민원인 분들. 교육포털에서 본 고객응대 관련 이론상 라포형성은 잘 된 것 같은데, 지나치게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건지.
지난주에는 어떤 어르신이 전화로 과태료 문의를 하다가 뜬금없이 범죄 없는 세상이 올까요? 물으시기에 사실상 범죄라는 것을 규정짓는 기준은 인간들이 만든 법이고 열 사람이 있다면 열 가지 생각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범죄가 완전히 없어지기는 힘들 것 같다고 소신껏 답했더니 계급과 성명을 묻기에 경찰관으로서 적절치 못한 답변이었나 설마 민원이라도 넣겠다는 건가 혹시 새로운 유형의 악성민원인가 긴가민가하며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키가 큰 백발의 노신사가 정장차림으로 박경장을 찾길래 저인데 무슨 일이시냐고 여쭈었더니 하는 말.
"혹시 잠언(성경)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