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 반질하고 딱딱한 정수리를 앞세우고 ‘먼저 들어오시지’ 하며 깐죽대는 꼴이란. 이제 막 솟은 엄지손톱만 한 뿔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하지만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저 하찮아 보이는 뿔도 나를 벼랑 아래로 밀어버릴 수도 있고, 십리까지 날려버릴 수도 있다.(내가 줄행랑친 것에 가깝다마는)
게다가 스프링처럼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뒷발차기까지. 그 끝엔 무쇠 같은 발굽도 있다. 발굽에 맞아보았는가? 정말 아프다. 온다, 온다, 뒷발굽이 날아온다. 팔로 걸쳐 막기를 해도 소용없다. 내 팔은 방패가 아니므로 무조건 아프다.
이 원수는 바로 어린 염소다. 싸움소가 절대 아니다. 한창 친구들이랑 고무줄놀이를 좋아하던 꼬꼬마 때였다. 나는 가축이었던 어린 염소를 논두렁에다 메어놓고 오는 일을 거들었다.
시골에서 염소 목줄을 잡고 말뚝까지 가는 일만큼 식은 죽 먹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처음에는 몰랐다. 염소는 성질이 괴팍하다는 것을. 거기에 자비란 없다. 상대가 여리면 더 가차 없다. 눈치까지 백 단인 것이다. 이제 뿔이 돋기 시작한 염소 새끼가 말이다.
염소를 모는 내가 ‘갑’ 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염소의 목줄을 잡고 있다는 것은 펀치가 허용된 권투경기의 링 위에 있다는 것과 같다. 논밭이 펼쳐진 초록의 링이다. 줄을 잡고 가는 동안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간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공격을 받으면 무서워서 뛴다. 그러면 염소도 뛴다. 나보다 빨리 총총 달려와 뒤에서 받아치고 또 나보다 앞에서 공격의 자세로 기다린다. 나는 다시 뒤돌아서 뛰다가 염소가 앞에 나타나면 또 돌아 말뚝을 향해 뛴다. 나중엔 아무 방향으로 무조건 뛴다. 아이고, 염소님 살려주세요!
줄을 놓아버리면 순간의 고통은 끝난다.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잃어버린 염소를 찾을 때쯤이면 남의 밭도 텅텅 비어 있을 테니까. 아찔하다.
결코 멀지 않았지만 멀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던 말뚝까지 여차저차 도착하면 거기서부터는 더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멀리서 음소거만 하고 본다면 ‘염소와 저 아이는 둘도 없는 친구네’ 할 것이다. 아, 우리는 죽어도 친구가 될 수 없어요.
나는 계속 공격해 오는 염소 때문에 말뚝에 줄을 묶을 수가 없다. 줄 끝만 잡고 말뚝 주위를 뱅뱅 돈다. 시간을 끌어봤자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내 등과 엉덩이를 몇 차례 염소의 샌드백으로 내어주어야 이 고통은 끝이 난다. 운이 더 없으면 말뚝에 줄을 묶다가도 염소의 공격으로 옆의 논두렁에 쳐 박히고 만다. 온몸이 아프다고. 이 (염소)새끼야!
내동댕이쳐진 나에게 염소는 또 한 번 날솟아 뿔로 받는다. 아, 권투 시합은 끝이라도 있지.
대체 너는 나에게 왜 그런 것이냐.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전술의 디엔에이는 왜 가축이 된 지금까지도 팔팔한 거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단계 변신에 대해서 나온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가 사막을 건넌다. 하지만 왜 건너는지 모른 체 주인의 명령만 따를 뿐이다. 그러다 사막에서 낙타는 자기 의지를 가진 강인한 ‘사자’가 된다. 사자는 ‘나를 따르라’는 용에게 거부하며 대적한다. 문제는 자유를 원하는 사자도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잘 모른 체 용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 단계에서 벗어나면 최고의 경지인 ‘어린아이’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함으로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무려 자유의지의 단계! 나는 ‘어린아이’였다고. 자유의지도 무식함과 만나면 의지가 꺾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소 너는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나보다 낮은 ‘사자’의 단계 아니더냐.
차라투스트라는 정말 몰랐을까? 무지한 공격이 최고의 경지를 박살 낼 수 있다는 것을.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잖은가. 그러니까 정신만으로 높은 단계의 변신을 꾀할 수 있는 노릇이냐고. 플러스 신체까지 함께 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예전의 말들을 모두 철회하고 다시 말하게 해야 한다.
나는 지금 뭐라는 거야.
이게 다 싸움꾼 염소 때문이다. 솔직히 외나무다리에서 그놈을 만났다면 나는 수십 번도 더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염소 풀 먹이는 일을 계속했던 걸까.
분명한 것은 녀석에게 ‘이번에는 꼭 복수하고 말테야.’라는 마음으로 염소 목줄을 잡았던 것이다.
말뚝까지는 호되게 나만 당했지만 말뚝에 줄을 묶고 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염소가 닿지 않는 곳에 서서 돌멩이 하나를 줍는다. 나는 염소의 배때기에 돌팔매질을 한다. 퉁, 하고 돌멩이가 튕겨져 나온다.
아, 분명히 통쾌했겠지. 메에에에 울어 봤자 네 녀석이 나를 때린 것에 비하면 내가 많이 봐준 줄 알아. 염소도 우리 집 가축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재물손괴죄로 아버지에게 혼쭐이 날 수도 있으니.) 무엇보다 저녁이 되기 전에 다시 집으로 몰고 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으므로. 무서워요.
나는 작년 동안 염소 그림을 자주 그렸다. 조금도 질리지가 않는다. 원수 시절을 생각하면 그 지릅뜬 염소 눈을 생각하기도 싫겠지만 이상하게 그렇지가 않다. 내가 당한 게 많아 억울한 일만 기억하는 건 아니다.
염소와 내가 엎치락뒤치락했던 그 기억 통째로 그냥 좋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물론 지금 가까이 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사양하겠습니다. 그저 멀리서 보겠습니다.
확실히 멀리서 보는 아기 염소는 귀엽다. 무척.
(PS-제가 나고 자란 곳이 시골이긴 하지만 친구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고요. 저희 아버지가 축사를 하셔서 특수한 환경에 처한 저만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