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을을 반가워할 사이도 없이 찬바람이 불었다.
추석 연휴까지 날씨는 그야말로 기분 째지게 좋았다. 파란 하늘과 기분 좋을 정도의 차가운 공기.
집을 나서서 마주하는 가을 공기와의 첫 대면은 절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게 했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 좋아~!' 하며 목소리를 눌러 복화술로 나만 들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오래오래 만끽하고 싶은 가을이 2주 만에 차갑게 돌변했다.
아니야 괜찮아, 진짜 가을이 왔어.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 막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완벽하게 날씨가 좋았던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서촌 나들이를 했다.
6월쯤이었나... 얼리버드로 예매해 놨던 전시회를 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가을이 오자마자 달려갔다. 전시회도 전시회지만 시원한 공기와 파란 하늘을 만끽하며 서촌을 걷고 싶었다.
딸아이도 기분이 좋았는지 신이 나서 앞서 걸었다.
남편 손을 잡고 둘이 나란히 걸으니 연애 시절 데이트 하던 때가 생각났다. 집은 인천이지만 남편은 서울에서 자취하며 학교를 다녔고, 나는 회사를 서울로 다니고 있어서 데이트 장소는 항상 서울이었다. 여기저기 잘도 다녔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덕수궁이 있는 정동길이었다.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 길을 수도 없이 걸었다.
남편과 연애를 하기 전부터 나는 그곳을 자주 갔었는데 정동극장을 지나 스타시티라는 극장이 하나 있었다. 매주 밤 12시부터 첫 차가 다니는 시간까지 개봉작을 연달아 세 편씩 상영하는 곳이었다.
그때 당시 영화가 한 편에 7천 원 정도였는데, 세 편의 영화를 만 이천 원 정도의 가격에 볼 수 있었으니 당시 영화 마니아로써 기꺼이 잠을 포기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일을 하면서 나름 밤샘 작업으로 단련이 된 나는 연달아 개봉작 세 편을 보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세 편 모두 외화로만 편성된 날은 자막을 보는 피곤함에 한 편 정도는 졸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나처럼 잠을 포기하고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영화는 첫 차가 다닐 무렵인 새벽 5시 반에서 6시 정도가 되면 끝이 났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영화관을 나서면 푸르스름한 어둠이 아직 채 밝지 않은 하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눈은 몹시 피곤하고 정신은 몽롱하지만 극장을 나와 얼굴에 차갑게 스치는 새벽 공기는 지하철역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가을이 되면 유난히 종로 나들이가 즐거워진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너무 매력적인 동네.
그냥 뭘 하지 않아도 고궁 앞 벤치에 앉아 돌담 밑으로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보다가 그 길을 지나가는 젊은 연인들과 동성의 친구 무리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나이 지긋하신 멋스러운 노인분들의 클래식 버스킹을 보는 것도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 풍경과 날씨가 주는 분위기는 그들을 더욱 멋스럽게 내 눈에 각인시킨다. 물론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기엔 딸아이의 인내심이 길지 않아 분위기 좋은 카페에 자리라도 잡고 앉아야 그 시간이 좀 더 길게 유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