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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상담소 Feb 20. 2023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더니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데,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무런 욕망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시멘트 조각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낡은 작업복을 입은 건지 쓴 건지 어쨌든 온몸에 걸치고 한 손에는 우스꽝스럽게 하얗고 빈 바께쓰를 들고 까만 얼굴로 멍하니, 정말이지 아무런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건지 그저 눈을 뜨고 있었을 뿐인 건지 아무튼지 간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공허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직업에 정말 귀천이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왜 꼭두새벽부터 땅을 뒤집고 파고 까고 지랄들을 하느냐고 굳이 차창을 내리고서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혹은 창문 너머에서 혼잣말로 씨팔놈 저팔놈 하고 분을 참지 못해 괭괭대는 이들은 어째서 저 길바닥에 까맣고 작고 꾀죄죄하고 초라한 막일꾼을 향해서 한치의 부끄러움도 한치 연민도 없이 어째서 그리도 쉬이 조심성도 없이 나오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지고 함부로 해대는 것일까.



출근길 나는 저 까맣고 보잘것없는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본다. 누군가 고급 세단의 까맣게 코팅된 차창 너머로부터 후줄근한 옷을 입고 보기 싫게 굽은 등으로 신호를 기다리거나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 하릴없이 버스정류장 전광판만 쳐다보는 눈알을,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얼굴을 보며 혀를 찰지 웃을지 욕을 할지 어떨지 몰라 괜스레 죄스러운 옷깃을 여미고 평소보다 더 좀생이 같은 포즈를 하고서는 냅다 횡단보도를 건너 역내로 뛰어 들어가 숨어 버리자.



산소가 적은 지하로 들어오면 외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슷한 처지의 비슷한 치들이 모여 군락을 이룬 이 땅굴 속 도시는 땀 냄새와 음식 냄새, 여러 가지 불쾌한 냄새들이 뒤섞여 나의 귀천(貴賤)을 자각할 수 있게 한다. 한 마리의 개미와 같은 나는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좁은 칸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역설적인 안정감을 느낀다. 천한 내가 천한 것들과 아무렇게나 뒤엉켜 흘러가는 시간이 마치 자궁 속처럼 편안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찬 바람 불어오는 지상으로 올라오면 황망히 쏟아지는 볕에 괜히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그 분에 넘치는 부심에 그만 황망히 눈살을 찌푸리고 마는 것이다.



_ 貴賤, 2022. 11. 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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