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있다.

첫 기억의 구매자가 된 나

by 야초툰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있다. 웃기는 이야기다. 겪어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있다.'


아마도 차란이의 이 기억에 대한 마지막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 눈앞에 보이는 흐릿한 화면에 빨간 글씨로 '주인공이 실제 겪은 기억의 조각이며, 어떠한 조작이나 편집 없이 재생됩니다'는 안내 문구가 빠르게 지나갔다.


이어서 객관적 관찰을 위해 기억 속 주인공의 목소리와 생각은 음소거 처리가 된다.라는 마지막 메시지가 사라지자 흐릿했던 영상이 점점 초점을 찾아 또렷해졌다.


대 연회장 체리색 라운드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흰색 정장을 위아래 세트로 맞춰 입은 사람은 세일즈 박팀장이었고, 그 옆에는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은 비서실 세련 주임님 그리고 민 사장이었다. 민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그러니까 차란 씨 우리도 이런 상황을 원한게 아닌데, 이게 참 곤란하게 되었어."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문다. 반대편에 앉아있던 박팀장과 세련 씨가 미안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사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니 차란 씨의 승진소식이 이미 다 본사까지 알려지긴 했지만, 세련 씨가 다시 회사에 남고 싶어 해서 그래서 우리는... 차란 씨의 의견을 한번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민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팀장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차란 씨한테 미안하게 됐어. 그런데 지금이 시기가 시기인지라 새로운 사람이 어떻게 일을 배워서 해. 그냥 하던 사람이 하는 게 더 빠르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차란 씨가 양보하는 게 어때?"

세련 씨는 미안한 듯 쭈뼛쭈뼛 말을 보탰다.

"미안해요. 차란 씨 "


양보? 뭐야 이거들이 미리 다 정해놓고 통보하는 거야? 어이없는 대화들에 나는 화가 났다. 이걸 직접 들은 차란이의 심정은 어땠었을까? 걱정스러웠던 순간, 차란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갑자기 그들이 당황하며 웅성이기 시작했다. 박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앉았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따졌다.


"뭐? 못 그만둔다고? 더 잘할 수 있다고?"


민사장이 화가 난 박팀장을 다시 앉으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게 박팀장 내가 말했잖아요. 차란 씨도 이 자리 꼭 하고 싶어 한다고 나도 다시 본사에 번복하기도 민망하고 그냥 결정된 데로 진행하기로 해요. 세련 씨에게 미안하지만 출산 후에 다시 돌아오면 그때 자리를 만들어 봅시다 알겠죠? 인수인계 잘 부탁드려요."


민사장의 말에 박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한참 째려보더니, 차란이 의 대답에 마치 놀란 듯 울고 있는 세련 씨를 달래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민 사장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보시다시피, 앞으로 쉽지 않을 거예요. 사장의 비서라는 자리가 꼭 사장과의 관계만 좋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마도 시작부터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그래도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 사장이 그러라고 있는 자리니까"


민 사장이 나간 후, 영상은 텅 빈 연회장에 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아마도 깜깜 할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 같이.


그리고 민사장의 예언처럼 쉽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인수인계를 해야 할 세련은 입술을 쭉 빼고 의자에서 팔짱을 낀 채 걸터앉아 불평만 늘어놓았다.


"아니 얼마나 억울해요.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임신했다고 했더니 대뜸 연장근무를 할 때는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는 문서에 사인하라지 않나. 자기 때는 아기 낳기 하루 전까지 야근하고, 애 낳고 두 달 만에 복귀했다지 않나.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하잖아요. 그래서 말했죠. 저 그만둔다고. 사실 그만둘 마음은 일도 없었어요. 그냥 나 건들지 마라 나 말고 이 일 할 사람 없지 않냐라는 통보였지."


듣고 싶지 않았다. 저런 자기 방어적인 변명들. 나도 모르게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더니 보이는 영상이 3배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세련 주임의 한숨 섞인 말투, 피곤해서 먼저 간다는 영상, 허탈하게 앉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멀뚱하게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게 일상.


퇴근하는 길에 항상 불 켜진 방 쪽을 바라보았다. 저긴 내 자리였다.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장작이 타는 듯한 분노의 타자 소리가 공허하게 복도를 울렸다. 창문 밖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런 날들의 연속.


'차란이가 참아야 했던 시간을 이렇게 빨리 감기로 돌려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웠다. 민사장이 힘들어 보인다며 가끔 밥을 사주는 때 빼고는 대화도 없이 회사, 집 장면이 이어졌다. 빠르게 지나갔지만 확실한 건 그 둘이 불륜으로 오해받을 만한 장면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의아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차란이의 시선이 정지한 듯 영상이 멈췄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두리번거려 봤지만, 여전히 영상이 멈춰 있었다. 마치 차란이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춘 것 같이 느껴졌다. 컴퓨터 모니터에 찍힌 시간은 9월 20일 오전 8시 30분. 시선이 닿은 곳엔 세련이 인사 부장에게 보낸 메일이 띄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중요하다는 듯 기억이 재생을 멈춘 것만 같았다.


9월 19일 밤 11시 30분. 차란이 가 인수인계를 해도 잘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서 이렇게 메일로 인수인계 할 내용을 정리해서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11시 31분 세일즈 박팀장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부장에게 차란이가 비서업무에 적합하지 않으며 매일 회의 시간을 착각해 미팅이 늦어지는 게 허다하다고 답변이 달렸고, 11시 32분 인사부장이 그들의 메일에 9월 20일 긴급회의를 오전 8시에 소집한다고 적혀 있었다.


참여자는 명목상 민 사장,차란, 박팀장, 세련이었지만 정작 차란은 그 메일을 8시가 지난 8시 30분에 읽고 있었다. 멈췄던 장면이 다시 움직이더니 차란이의 시선이 핸드폰을 내려 보았고, 인사부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핸드폰에 비친 메시지에는 '차란씨 지금 바로 연회장으로 오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밤 사이에 자기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그 결과를 통보하는 것 같아 보였다. 역시나 인사부장이 대 연화장에 차란이가 도착하자마자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직서를 건넸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흐뭇하게 웃고 있던 세련과 박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민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억울하다고 말하는 듯 영상이 격하게 흔들리며,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이 보였지만 이어지는 건 그들이 웃으며 나가는 뒷모습뿐이었다. 그 바람에 책상 위에 놓였던 사직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한번 텅 빈 연회장. 영상의 각도가 아래로 향하더니 점점 흐릿해졌다. 검은 화면에 차란이의 생각이 엔딩 크레디트로 올라갔다.


'그때는 분명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하지만 기억 속 그어둠은 한 발만 뻗으면 벗어날 수 있는 내 그림자였다.'


빌어먹을. 욕이 나오려는 순간 모든 기억의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는 안내와 함께 결제 화면으로 이어졌다. 1,000원 이하의 금액이어서 계좌이체만 가능하다고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나는 돈을 보낼 계좌 번호를 붙여 넣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영원한 290원짜리 동료가'라고 임급 자명을 적어서 보냈다.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만 아는 그 기억의 결말은 결국 박팀장은 내가 나가서 이사가 되고, 세련 씨는 출산 휴가 갔다가 대리로 복귀하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호랑이 굴에는 결국 늙은 호랑이들만 남게 된 것이다. 이제는 머릿속이 아니라 뱃속이 꼬이는 것 같았다. 오늘 잠은 다 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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