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미모리가 읽어준다는 차란이의 답장을 나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한 행동 때문에 그 애가 아직도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황급히 책상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만 급하게 챙겨서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멀리서... 미모리가 나에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없다. 없을 것이다. 분명히"라는 몇 마디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뛰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에게 도망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렸다고 생각했다. 터져 나오는 숨을 간신히 추스르며 뛰어온 거리를 돌아봤는데 겨우 500m쯤. 아직 빠져나온 회사 건물이 엄지 손가락 만하게 보였다. '네가 그렇지 김 수연 니깟게 도망가 봤자 겨우 여기지'라는 생각에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핸드폰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젠장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간신히 힘 빠진 다리를 움직여 핸드폰을 주었는데, 요란한 알림 소리가 울렸다.
더 메모리 컴퍼니 어플에서 울리는 알람이었다. 업데이트하라는 건가? 이 밤에? 나는 땀에 젖어 축축한 손으로 요란한 알람을 끄기 위해 어플을 켰는데,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알림 1
'서 차란님이 김 수연 씨에게 기억을 팔고 싶어 하십니다. 2020년 9월 1일에서 9월 20일까지의 기억을 290원에 그녀의 기억을 사시겠습니까?'
-더 메모리 컴퍼니-
290원이라고? 설마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축축한 땀들이 핸드폰 화면에 떨어지자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나 혼자 갇혀 있던 방.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쓰고 고치던 곳. 나와는 어울리지도 않은 올 블랙 원피스 꽉 끼게 입고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는데 차란이 가 내 방 문을 두들겼다.
"오늘도 야근인가요? 선배님?"
찬란이는 방금 탄 것 같은 김이 나는 믹스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하루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못해 갈라진 입술을 적시라며 커피를 건네곤 했다.
"아.. 차란이구나. 나의 야근 동지! 오늘은 좀 빨리 끝났나 보네?"
나의 농담에 차란이는 씽끗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은 내일에 나에게 넘기기로 했어요."
네가? 라며 팔짱을 끼며 차란이를 비웃었는데, 차란이는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기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리곤 괜히 내가 쓰고 있던 펜에 딴지를 걸었다.
“선배는 회사에서 나오는 연봉도 많이 받으시면서 왜 맨날 그 똥 나오는 펜만 쓰세요? 고지식하게?"
“고~지식?볼펜에서 나오는 똥이 왜 어때서? 이쁘기만 하구먼 남이 싸질러 놓은 똥보다는 훨씬 깨끗한데?“
나는 빼곡하게 적힌 수연 씨에게 인수인계라고 적힌 메일들 몇 개를 띄워 차란이에게 보여줬다. 나오는 건 한숨이요, 해야 할 일은 산더미구나.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차란이는 내가 급하게 마신 빈 커피 잔을 자신이 마신 커피잔에 포개며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말해보는 건 어때요? 힘들다고"
"차란이 네가 아직 뭘 모르는구나? 그래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야. 잘 들어. 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나를 위로하겠지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걸 구실 삼아 쟤는 일할 때 불평이 많았네, 의지가 약하네 하는 약점으로 만들어버려. 잘 기억해 차란아! 회사 안에서는 진정한 동료를 만들 수 없어. 다 암묵적인 경쟁자들 뿐이야."
"경쟁자라..."
내가 한 말에 차란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갑자기 분위기를 너무 무겁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에 가볍게 농담으로 이어갔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이 290원짜리 동료를 사기로 한 거야. 심지어 내돈내산이라고! 이 친구의 제일 좋은 점은 뭐냐? 내가 무슨 말을 종이에 적어도 옮길 수가 없어. 찢어버리면 그만이거든. 내가 이 우라질 이 부장!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나한테 쓰레기 보고서 보내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래야 다음 날까지 급한 내가 고치니까.라고 쓰잖아? 그럼 마법처럼 이 볼펜에서 똥이 나와. 그럼 이상하게 속이 후련해 진단말이야 마치 그 똥이 내 마음속에서 나온 것처럼..회사에서 이만한 동료가 찾기 힘들다고! 하하하하하 “
나는 자랑스럽게 볼펜 똥이 잔뜩 뭍은 펜을 추켜올렸고, 차란이는 그럼 자신의 승진 선물도 똑같은 동료를 사달라고 능청스럽게 부탁하며 퇴근했다.
사실 비싼 펜을 들고 다니다가 잊어버리는 게 돈이 아까워 싸구려 펜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대충 둘러낸 말이었데도 말이다.
다음날, 아침 실적 보고를 하기 위해 올라간 사장실 분위기가 평소보다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는 거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내 질문에 이번 달 말까지 일하기로 되어 있었던 사장실 비서실 세련 씨가 입을 삐쭉 내며 불평하듯 말했다.
“아니 글쎄 제 후임으로 온 차란이 걔 있잖아요. 완전 꽃뱀이었데요. 비서실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민사장을 정말 꼬여내서 이혼 직전까지 가게 만들었다나 봐요. “
”에이~세련 씨 말도 안 돼요 그런 애가 아닌데… 세련 씨가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
“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출근한 차란 씨가 정말 쫓겨나가듯이 나갔어요. 이렇게 짐도 못 챙기고 말이에요. 저만 이게 뭐예요. 그만두려고 했는데 졸지에 출산 휴가 전까지 일하게 되었네요. “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친한 동료가 해고되었다니 그것도 불륜으로? 만약 그렇다고 해도 분명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어제 남에게 말해봤자 어차피 약점이 된다고 늘어놓았던 충고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차란이가 어떤 마음으로 내 사무실에 문을 두드렸는지도 모르고 그 시간을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고 있던 나 자신에 대한 창피함이 몰려왔다.
급하게 아침 실적 보고를 마치고 사장실을 빠져나와 차란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소문이라 쉬쉬하기 급급했다. 그 뒤로도 영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런데 갑자기 오늘 미모리가 차란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심지어 나에게 기억을 판다니. 생각지 못하게 벌어진 일들에 혼란스러워졌다. 알람을 무시해 버리려고 알람창을 끄려는데, 기억을 판다는 문구 아래에는 수신자가 보낸 메시지가 빨갛게 적혀 있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면... 290원짜리 제 동료가 되어주시겠어요? 선배님?"
쿵.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뭉클한 무언가가 가슴에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죄책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이었을까? 눈물이 사정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저히 이렇게 도망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땀에 젖어 미끌거리는 손가락을 아래로 움직여 'YES'라는 버튼을 눌렀다.
‘전원 버튼에 손가락을 대세요. 그리고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알람이 뜨기 전까지 손가락을 떼지 마세요'라는 알림 창이 떴다.
전원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통해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불현듯 얼마 전 미모리가 한 말이 문뜩 떠올랐다.
"사람의 기억을 전송하는 건 간단해요. 몸에 세포들을 깨우는 거죠. 왜 그럴 때 있지 않나요? 전 남자친구가 뿌렸던 향수를 맡을 때 아니면 같이 먹던 음식을 먹을 때 기억이 살아나는 느낌이요. 그건 다 세포 안에 기억을 저장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땀을 통해서 그 기억을 전송하죠 전류가 흐르게 말이에요."
"그럼 그때 내가 면접 볼 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도 일부러?"
"아! 맞아요. 면접 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기억을 읽어야 하는 저로서는 필요한 장치를 해 두는 거죠."
미모리의 설명대로, 내가 구매한 차란이의 기억이 내 세포 속으로 옮겨 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눈에 어떤 영상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