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로 엮여버린 인연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볼 일이 있었다. 무심코 넘기던 중에 진로 희망이라는 칸에 시선이 멈췄다. 그 칸에 정확히 작가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으니까.
고등학교 때 내 꿈이 작가였다니. 상상하지도 못한 드라마의 결말을 본 것처럼 눈동자가 커졌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었을까? 기가 찼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부모님이 쓴 나의 장래 희망이었다. 의사. 양가로 가득한 내 성적표를 보고 어떻게 엄마는 그런 직업을 적어낼 수 있었을까? 웃음이 내 입가를 간지럽혔다. 그러고 보니 얼핏 기억도 나는 것 같았다. 장래 희망 칸에 의사를 적은 엄마에게 내가 따지던 기억이.
“엄마, 내 성적표가 양가집 규수인데, 어떻게 의사를 적을 수가 있어? 말도 안 되는 거 알지?”
“야, 책 한 권도 안 읽는 네가 진로 희망 칸에 작가를 쓴 건 어떻고, 엄마도 엄마의 희망 사항을 적은 거야. 딸과 엄마의 희망 사항이 굳이 같으라는 법이 있어?”
그때는 당황했다. 뻔뻔한 엄마가 한 말에 반박할 말이 없어서. 희망이라는 건 어차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에 따르면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럼, 엄마 마음대로 해. 하고 그냥 그 종이를 제출했었다. 신기했다. 나는 비록 엄마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내 바람대로 작가가 되었다.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다. 희망 사항이 바람을 타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욕심을 더 내볼걸. 베스트셀러라는 단어를 추가해서 적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소심한 바람.
그러다 문뜩 남편의 생활기록부도 궁금해졌다. 남편에게 생활기록부를 꺼내 오라고 말했다. 우리는 같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같은 지점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남편의 장래 희망. 마치 아버님이 적으시고 남편이 따라 적은 것처럼 같았다. 회사원. 장래 희망이 회사원이라니.
불 꺼진 도시에 쓸쓸히 걷고 있는 회색빛 얼굴의 회사원이 떠올랐다. 남편 역시 자신의 꿈을 하염없이 내려보았다. 좋아하는 건 음악, 노래지만 정작 꿈은 회사원이라고 적은 남편. 부모님이 안 된다고 하면 바로 알겠다고 말하던 아이. 어렸을 때 모습이 떠오르는 듯 남편의 눈가에는 눈물이 쏟아질 듯 흐를 것 같았다. 입이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듯한 모양새였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의 팔이 내 오른쪽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그윽하게 올려보며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
나는 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그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걸. 도망가려 해도 내가 있는 방까지 쫓아야 굳이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깊은 한숨을 깊게 몰아쉬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미 많이 들었지만, 마치 이 이야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소품 가게라고 귀엽게 글씨가 쓰여 있는 가게가 있었어. 형형색색의 빛이 있는 곳이었지. 나는 그곳에 작고 귀여운 장난감과 나에게 인형이 들어오라며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나는 차마 발을 떼지 못했지. 그저 밖에서 바라볼 뿐이었어. 눈앞에는 분명 창문만이 놓여 있을 뿐인데, 그 창문이 마치 내가 절대 뚫지 못하는 벽과 같이 느껴졌달까? 내가 망설이고 있었는데, 네가 나한테 묻더라고.
“승준아, 왜 보고만 있어? 같이 들어가자!”
“내가 들어가기엔 가게가 너무 좁아. 그리고….”
‘이렇게 덩치가 큰 내가 귀여운 인형들이 귀엽다고 하면 사람들이 징그럽다고 비웃을 거야.’라는 말을 차마 너에게 하지 못했지. 귀여운 건, 내가 좋아한다고 선택할 수 없는 세계 같았거든. 옷 가게에 가더라도, 나에게 항상 돌아오는 건 "죄송합니다. 저희 매장에는 손님 크기가 없네요." 대답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물어보지도 않게 된 것 같아. 갖지 못하는 마음보다 내가 남을 불쾌할까 봐. 불쾌함이 나를 향한 질타 같았거든. 그러다가 남의 부탁에 거절을 못 하는 남자가 되었지. 그게 지금의 나야.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어. 그건 아마도 시작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 그래? 그건 내일 이야기해 줘.”
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그는 이미 시작된 이야기는 멈출 수 없다는 듯, 어렸을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나를 키우기 쉬운 아이라고 말했어. 울지도 않고 보채지 않는 순둥이.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그런 아이였던 거지. 그래서 늘 혼자였어. 혼자 놀던 내가 마주한 건 엄마의 뒷모습이었어. 항상 엄마의 시선은 나보단 까다로운 누나를 향하는 날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슬프지 않았어. 나는 착한 아이니까.
그랬던 내가 한 번은 처음으로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돌아온 답이 뭔지 알아? 다음에 하자였어. 지금은 집이 힘드니까. 어렵다는 거였어. 진짜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거절당하니까. 집안 사정이 정말 괜찮아졌을 때도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지더라고. 그래도 용기 내서 다시 한번 말해보려고 했는데, 눈치챈 엄마가 그러더라고, 우리 아들 착하지. 착하니까.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 없다는 걸 이해할 거야.라고 말하시더라고. 마치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건 착한 아이가 절대 넘어서 안 되는 선이라는 듯. 그런데 또 나는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따랐어.
‘그래. 나는 착한 아이니까. 다음에. 내가 벌어서 하면 되지. 그래 다음이… 있을 거야.’
그때부터였을까? 가슴속에 대해 알지 못하는 멍울 같은 슬픔이 피어올랐어.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말할 수도 없다는 서러움. 착하다는 말에 억눌려 나를 감춘 채 살아가는 것에 어느새 익숙해졌으니까. 아마도 생활기록부도 내 그런 모습이 드러난 게 아닐까 싶어.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답을 적는 삶이었어. 내 삶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
길어지는 남편의 이야기에 정신을 놓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나를 말을 하는 남편의 목소리에 한껏 더 놀라며 물었다.
“응. 너. 그랬던 내가 결혼을 한 거야. 나와 너무나 다른 너와. 장모님은 너를 천방지축 소녀라고 표현했었지.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아무도 못 말렸다고. 그냥 가벼운 농담이라고 생각했어. 나로서는 말이 안 되잖아.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는 건. 그런데 같이 지내보니까 알겠더라. 넌 정말 하고 싶은 건 하고 싶다고, 정확히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처음엔 너의 그런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했어. 그래서 많이도 싸웠던 것 같아. 너의 행동엔 항상 왜라는 질문이 따라다녔으니까. 이해할 수도 있는 이해하기도 싫었어. 어쩜 저렇게 천방지축 자기 마음대로인 사람이 있을까? 하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다르게 보이더라고. 나도 모르게 천천히 스며들었다고 했다고 해야 하나? 너에겐 가시 돋친 울타리가 없었어. 자유로워 보였달까. 그러다가 나도 저렇게 행동하고 싶어졌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너의 모습이 묘하게 통쾌해 보였으니까. 착한 아이가 아니면 어때? 그렇다고 또 나쁜 아이도 아니잖아. 거울 앞에서 묘하게 나를 설득하게 되더라고. 매일 내가 보는 건 자유로운 너니까. 나는 아마도 너를 보며 가슴에 박혔던 착한 아이라는 가시를 핀셋으로 하나씩 뽑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랬으니까. 뜨개질하게 된 게 아닐까? 장모님이 내 손 위에 올려준 코바늘은 너무 작고 귀여웠으니까. 작고 귀여운 건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물건이었어. 거절도 못 하니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장모님이 나에게 처음으로 물어본 거야.
“하고 싶어? 코바늘? 하고 싶으면 해야지! 뭘 망설여?”
그 순간. 갑자기 어릴 적 하교하던 친구들이 태권도 학원에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 소년이 떠올랐어. 친구들을 보내고 뒤를 돌면서 다음에 다음을 외치던 목소리도. 이제 그 목소리로 다른 말을 하게 된 거야. 하고 싶다고. 처음이었어.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귀까지 전해지는 느낌이. 가슴이 벅차올라서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지. 그 떨림을 아직도 기억해. 첫 코를 떴을 때의 그 기분. 순간, 그 공기. 안 된다고 나를 다그쳤던 시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뀐 변곡점을 말이야.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가방까지 만들 수 있는 뜨개인이 되었어. 착한 아이였던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루고 있는 거야.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더 많은 일을 꿈꾸고 있어. 아름답지 않아?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 아니었어. 가치 있는 사람이었단 말이지.”
“결론적으로 나 때문에 네가 바뀌었다는 거잖아.”
“그렇지. 맞아.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내 이야기는….”
“그럼, 나에게 잘해. 착한 아이는 못 되었지만, 착한 남편이 되도록.”
“T형 인간. 악처.”
남편은 나에게 거친 말을 뱉었다. 마치 자신이 이제 나쁜 아이가 되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어차피 남편이 말하는 이야기 중간부터 안 듣고 있었으니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연히 꺼내 본 생활기록부가 되살린 남편의 기억 때문에. 기억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말 안 들었던 나도. 착한 아이였던 남편도 그곳에 남아있었다니.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주듯, 우리 부부 또한 서로 다름으로 인해 서로를 바꾸고 있는 건 아니냐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바뀌는 게 아니라지만, 악처를 만나면 바뀔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웠다. 장래 희망이 점이 되어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듯, 뜨개가 남편을 바꾸고 있는 건 분명하다.
남을 위한 착한 아이에서 자신을 향한 착한 아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