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일했는데 퇴직금이 0원이라고요?"

씬디 북클럽, 그리고 모녀 북클럽의 시작

by 씬디북클럽


"엄마, 나 10년 일했는데,

퇴직금이 0원이래."




혹시나 싶었다. 역시나 기분은 별로였다.


프리랜서 강사들은 개인사업자로 등록된다. 퇴사 시 별도의 퇴직금 지급이 없다. 매 년 5월 경 종합소득세 뭔가 하는 것도 다 그 이유였다. 코로나 시국에 프리랜서 강사들에게 지급된 1차, 2차, 3차 재난지원금 생각이 났다. 아, 그 퇴직금이라고 퉁쳐야 하나?


지친 기색이 역력한 직원은, 자신의 과오로 내 퇴직금을 못 챙겨주는 것 마냥 한없이 미안해했다. 고용노동부를 나설 때의 발걸음은, 들어설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전직 어린이집 교사, 현직 요양보호사로 근무 중이신 엄마와 함께였다. 비좁은 주택가, 엄마 집에 내려드리며 말했다. 엄마, 나 10년 동안 남은 거라곤, 운전 실력뿐이네.




"얘, 그거라도 남았으니, 그게 어디니?

그리고 10년 동안 네 용돈 네가 벌어 쓰고 살았으면 그걸로 됐지, 뭐."




아, 그렇구나. 그거라도 남았구나. 길이 막힐 때 이 길로 가면 덜 막힐 거야. 이번 신호등에 걸리면 다음 신호등까지 걸리겠구나. 여기에 주차하면 얼른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해 올 수 있겠다. 이 아파트에는 지하주차장이 바로 연결이 안 되어 있었지? 아, 닿을 듯 말 듯, 안 닿겠지, 아 통과했다. 여기는 잠시라도 정차하면 바로 카메라에 찍서 안 돼. 아, 나 숨은 고수네.


나의 급여는 남편 왈, '유니콘'이었다. 존재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긴 하는데, 실체를 본 적이 없단다. 또한, 굳이 일부러 찾아서 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란다. 그래, 나는 나의 급여들을 생활비에 보태지 않고, 내 선에서 써야 할 지출들에 쓰면서 살아왔구나. 펑펑 까지는 아니라도, 친한 지인들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하기를 좋아했다. 남편이 중고차를 살 때도 살짝 보탰다. 나를 위한 거금의 문화생활을 하며 살 정도는 벌어 썼다. 맞네, 맞네.







영유아 음악 프로그램 프리랜서

문화센터, 어린이집 출강 강사 10년,

나에게 남은 것들을 돌아본다.

내가 잘하게 된 것들이기도 하다.




예쁜 입은 아니지만, 예쁜 말들을 한다.

핑크 앞치마와 토끼 머리띠를 쓴 '토끼 선생님'으로 변신 완료하고 나면, 나의 목소리는 기본 '솔' 톤이 된다. 입가에는 활짝 (비즈니스) 미소가 장착되고, 눈가의 주름이 생기도록 한 없이 웃고 또 웃는다. 아이들에게도 엄마들에게도 원장님들에게도 예쁘게 말을 한다. 얼굴까지 예쁘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 말은 예쁘게 한다. 집에서 토끼 선생님 말투로 얘기하면, 세 사람의 여섯 개의 눈들이 동그래진다.

"엄마, 어디 아파?"

"당신, 괜찮은 거 맞지?"


두 손 두 발, 오감을 이용해 아이들과 놀 수 있다.

아이들의 이름을 잘 외운다. 아이의 컨디션이나 기분을 살필 줄 안다. 특별한 장난감이나 교구가 없어도 최소한 30분은 놀아줄 수 있다. 아이들의 발달 시기와, 하우너의 다중 인지 이론, 요새 한창 뜨는 메타 인지 이론들.. 을 이용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어떤 방식이로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귀를 쫑긋 열고 잘 들어줄 수 있다.

두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운 시간에 10년의 커리어가 더해졌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힘이 들어 아이가 얼른 잠들기만 바라는, 엄마들의 마음을 안다. 육아에 지친 엄마들의 눈물 글썽이는 하소연을, 잘 들어드릴 수 있다. 원생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힘이 들어 내가 이거 때려치워야지 하는, 원장님들의 마음을 안다. 원 운영에 지친 원장님들의 푸념들을, 잘 들어드릴 수 있다. 공감이 별거인가. 경청이 별거인가. 내 말을 줄이고 고개 끄덕이고 눈을 맞춰드리면 되는 거 아닌가.



강소영 토끼 선생님, 쑥스럽지만, 이 역시 나의 역사가 되리라 믿는다..지만 살짝 부끄럽긴 하다. 브런치는 이런 분위기 아닌 것 같던데.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이 또 남았다.

내게 남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정말 잘하고 싶은 것.






코로나로 문화센터와 어린이집들이 문을 닫았다. 나와 같은 영유아 출강 강사들은 하루아침에 수입이 끊겼다. 그만두는 강사들도 생겨났다. 사업체들이 문을 닫기도 했다. 내 아이들의 학교도 온라인 원격수업으로 전환되었다. 하루하루 확진자 수 그래프에 따라 몸과 마음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었다. 이 참에 집에서 쉬자 하던 생각도 지루해질 무렵,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바쁜 중에도 책 한 두 권씩은 꼭 챙겨 읽었다. 이참에 책이나 읽어야지 했다. '슬기로운 책 콕 생활'이나 해 보자.


내가 1년에 몇 권이나 읽는지 권수를 세어보자. 노트에 끄적여 놓던 책 목록을 sns에 올려서 나의 디지털 독서록을 써 보자. 주로 소설만을 읽어 온 나였지만, 읽다 보니 이런저런 책들이 따라붙었다. 한 줄 한 줄 깊이 읽지는 못했고, 완독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잘 읽히는 부분만 찾아 읽기도 했지만, 그래도 읽었다. 2021년 2월에는 독서법, 책모임 등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서 읽었다. 흥미로웠다. 나도, 한 번 해 볼까?


온라인 독서모임을 찾았다. 아니, 책 읽는데 참여비가 있다고? 책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저자와의 북 토크도 아니고, 함께 분량 나눠 읽고 줌 미팅 한 번인데, 3만 원? 책값 아끼느라 도서관 책 대출하고, 알라딘 중고 서점의 상태 중 저렴이들만 구매하던 내게는 거액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해 보자. 뭔가 얻는 게 있겠지. 아님 말고. 아끼고 아껴 놓은 프리 강사 1차 재난 지원금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살짝 열었다. 참여비를 내고 책을 구입하고, 리더가 정한 책 한 권을 3주에 걸쳐 읽었다. 매일 분량에 따라 읽고 인증을 하고, 줌 미팅에 참석했다.



반짝,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이거네, 내가 찾던 것,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내가 어쩌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바로 그것이었다. 계속해서 책모임들에 참여비를 내고 참여했다. 책모임, 북클럽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천천히 정리했다. 한 번 해 보자. 해 보면서 배워가자. 그리고 나의 책모임 이름을 정했다.



그리제 (김미라) 님이 그려주신 프로필 그림, 맘에 꼭 든다.

씬디 북클럽


내가 좋아하는 나의 영어 이름 Cindy

(aka. 씬디 or 신디)

책모임이라는 뜻의 단어 Book Club

혼자 읽어도 씬디 북클럽

함께 읽어도 씬디 북클럽


나의 책모임들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들과 책을 읽고 줌 미팅으로 생각을 나누었다. 직장 동료들과 책을 읽고 나누었다. 챙겨 놓고 안 펼쳐 본 영어 원서를 읽고 나누었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어려웠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혼자 읽은 책들은 재미가 있기도 없기도 했지만, 함께 읽은 책들은 재미없어도 재미있어졌다. 또 다른 세계였다. 그래서 독서토론을 '독서의 꽃'이라고 부르는구나.








계속하고 싶어졌다.

재미있게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 재미있는 세계에,

친정 엄마를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나 책 쓰고 싶어. 글 쓰고 싶어. 그런데 엄마가 도와줘야 해."

"우리 딸, 멋지네. 근데 도와주긴 뭘 도와줘?"

"엄마랑 나랑 책 읽는 거야. 어려운 책 안 할 께.

내가 정한 책 읽고 그냥 나랑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자."

"아이고, 내가 눈이 어두워 한 페이지라도 제대로 읽으려나, 성경책 읽기도 힘들어."

"안 돼, 해야 해. 하자. 엄마. 응?"

"딸 이기는 엄마가 어디 있겠니. 알겠다, 알겠어."




10년의 시간 끝에서 찾은

내가 잘하는 것들

내가 잘하고 싶은 것들

내가 재미있게 하고 싶은 것들


퇴직금 0원의 허무감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 또한

나에게 남겨 주었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나누어요

Cindy Book Club


그리고 나는

44세 딸 씬디와 66세 엄마 이여사의

모녀 북클럽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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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아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것 또 하나. 나는 브런치 첫 글 제목을 뽑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에게 남은 것들이 많다니, 대박이다. 그리고 감사하다.

2) 라테와 꽃이 있는 첫 사진은, 수원에 위치한 부부 플라워 카페에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