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화가 아닐 이유도 없고요
직장인에게 금요일 오후만큼 들뜨는 시간이 있을까. 출근길 발걸음은 가볍다. 점심 먹고 돌아오면 퇴근까지 딱 3시간 남는다. 기획안 하나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 회의가 있다면 하나 정도를 하고 마무리하면 깔끔하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프로젝트가 갑자기 내 앞에 떨어질 때다. 지난 금요일 오후가 그랬다. 올라갔던 발끝은 한껏 풀이 죽어 바닥과 혼연일체 되었다. 분한 마음에 지갑을 챙겨서 회사 근처 교보문고로 갔다. 다 죽었다.
<패스트 라이브즈>와 <헤어질 결심>의 각본집을 샀다.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데, 사회적 인간으로서 그럴 수 없으니 영화의 세계를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뒷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영화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가, 성인이 되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 누구나 그런 친구가 있을 것이다. 유치원 때 서로를 신랑신부로 점찍은 사이. 초등학교 운동회 때 꼭두각시 춤을 함께 추면서 엄마들끼리 미래를 약속한 사이. (SH아 잘 지내니?) 서른을 앞둔 나는 예측하지 못한 업무에 환멸을 느꼈지만, 이 책 한 권으로 해맑기만 했던 순간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씩씩거리며 건물의 입구를 나섰으나 돌아올 때는 피식피식 거리면서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중에 돌아보면 한 장면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마치 긴 영화의 어느 부분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미간의 주름을 살짝 펴게 되었다.(카메라는 없지만 주인공이라면 미간 주름은 좀 그렇다) 고등학생 때 소원이었던 서른의 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굳이 더 불행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지금 내가 힘들다고 하지만 길거리에서 쌍욕을 먹던 때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배는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힘듦은 내 선택이다.
전생에 나는 아마 야망 가득한 장군이었을 것이다. 현생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하고 싶은 게 많고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변을 따뜻하게 챙기는 마음은 부족하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차원의 노력을 더 많이 하는 편이다. 원하는 게 많으면 그만큼 더 애쓰면 된다고 배웠으니까. 어렸을 때 열심히 공부한 것도, 회사에서 더 많은 일을 맡는 것도 내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이 모여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희망을 선명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서른의 일태기를 일로 극복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의 영화에서 힘을 얻는다. 내 몸 깊은 곳에 숨어있는 추억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야심 찬 서른을 보내고 있는 서른 살 직장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라면, 그 주인공이 꽤 힘든 상황들을 마주친다면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지 않겠냐며 생각하면서. 연기가 별거인가. 그런 척하면 되는 거지. 그냥 쿨한 척 넘기다 보면 정말 아무렇지 않아 질지도 모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