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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Sep 11. 2024

떡상의 열병

내 유튜브가 열흘 만에 십만 구독자가 됐다.


 아침 아홉 시쯤 느지막이 잠에서 깬다. 알람 없이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생활을 한 지 벌써 2년 하고도 반년이 넘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 하나 덜렁 멘 채로 세계여행을 떠났던 게 약 2년 4개월 전. 젊은 날의 패기를 기록할 겸, 혹시나 여행경비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볼 겸, 나는 그때부터 여행유튜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행유튜버의 길은 험난하고도 고됐다. 김연아 선수의 유명세 이후 탄생한 수많은 '김연아 키즈'들처럼, 유튜브판에는 빠니보틀의 성공을 우러러 유튜브에 뛰어든 '빠니보틀 키즈'가 드글거렸다. 그 레드오션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컨텐츠에 대한 고민도 해보지 않은, 그렇다고 외국어가 그렇게 유창하지도 않은, 웬 한국인 여자애가 혼자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는 영상들은 냉정한 유튜브 세계에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나마 여행 초반부 동남아에서 찍은 영상들을 봐주던 사람들도 내가 유럽에 입성하고 난 후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유명인들이 으레 말하던 '악플보다 무플이 무섭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영상을 올리고 나면 구독자가 늘다 못해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을 몇 번이고 목격하고 난 나는 그나마 뜨문뜨문 올리던 영상 업로드를 완전히 멈춰버렸다. 열심히 편집을 해도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몇몇 구독자에게서도 잊혀갔고, 나의 도전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거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적인 수순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일감은 끊이지 않았다. 여름엔 집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알바를 하고, 틈틈이 친한 언니의 부탁으로 의뢰받은 외국인 대상 프로젝트의 소통업무를 도왔다. 시골에 짓고 있던 새집이 완공이 된 후엔 친구의 부름을 받아 영국의 런던으로 훌쩍 떠나 세 달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곳에서의 일이 모두 마무리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승을 할 겸 이집트의 다합을 다시 들렀다가 그곳에서 무척이나 행복한 2주를 보냈다. 그래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또다시 함께 태국여행을 떠났다.


 방콕에서 파타야로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아버지께 연락 한 통을 받았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사라졌다는 거였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도 도통 이해가 안 됐다. 18살이나 먹은 말티즈 영감님이 스스로 집 밖을 나갈 기력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아버지는 한 치의 거짓 없이 내게 사실을 말하는 거라고 했다. 오랜만에 날이 너무 좋아 아이를 안고 밖에 나가서 산책을 시키다가, 따뜻한 햇살 아래 벽에 등을 대고 앉아있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는 거였다. 눈을 뜨니 마당에서 키우는 큰 개 두 마리만 곁에 있을 뿐 말티즈 영감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 아이를 찾기 위해 나는 온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소용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필이면 내 여권이 분실신고 후 대사관에 재발급 요청이 들어간 상태라 긴급여권을 발급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발만 동동 구르며 여권이 예상 발급 날짜에 나올 수 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여권을 되찾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그 아이를 잃은 지 5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항상 내가 집에 돌아가면 자다 깬 또끈한 얼굴로 가녀린 꼬리를 위태롭게 흔들며 나를 반겨주던 그 아이가 정말로 집에 없었다. 그렇게 작디작은 존재 하나의 부재만으로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한순간 썰렁하게 느껴지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단지를 만들어 붙이고, 주변 유기견 센터 및 동물병원마다 전화를 해 물어보는 일도 2주째가 되었을 무렵부터 슬슬 줄였다. 이젠 진짜로 그 아이가 내게서 떠나갔다는 일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혹자는 '개는 원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면 스스로 죽을 곳을 지가 찾아 떠난다.'라고 했다. 평소 그 아이의 성격대로라면 진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그 아이가 스스로 자취를 감춘 것이 마치 "누나. 이제 정신 차리고 뭔가를 좀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겠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충격 요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속이 깊은 그 아이라면, 진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아이의 실종을 천천히 받아들이면서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예전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던 열정이 그리운 것도 같았다. '다시 일을 시작해 볼까?' 나쁘진 않은 선택인 것 같은데 뭔가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 아이가 고작 날 다시 일터로 보내려고 희생을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잠들기 전마다 침대에 누워 골똘히 내 미래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 봤다. 그 아이라면 "누나. 전에 하던 거 있잖아. 그거 계속해봐. 난 누나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그 아이라면, 진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새로운 다짐을 굳게 하고 싶어서 기존에 하던 채널 대신 0부터 시작하는 채널을 새로 만들고, 그전 마음가짐과 다르게 촬영 전부터 촬영 후까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공부하고, 실행했다. 이 여행은 이제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자 발악이었다. 또한 이 여행은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겐 그 아이의 숭고한 뜻을 잘 받들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새로운 채널에 새 영상들이 업로드되자 구독자가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이는 속도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 사람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나의 매력을 찾아내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게 처음엔 살짝 뿌듯하다는 정도였는데, 성장세가 점점 장난이 아닌 수준으로 뛰기 시작했다. 8월 29일, 한 영상이 알고리즘을 탔는지 조회수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금방 사그라들 줄 알았던 그 성장세는 며칠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 내 채널은 새 영상들을 업로드 한 지 3달 남짓되는 기간만에 구독자 수 만 명을 달성하게 되었다.


 구독자 수 만 명을 달성한 날, 나와 아버지는 집 근처 작은 국밥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아버지가 식사를 잘 못 하시는 것 같아 슬쩍 곁눈질을 했더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고 계신 거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팽 돌았다. 우리는 그렇게 국밥집에 마주 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며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을 먹었다. 그 아이가 옆에 함께 있었다면 둘이 개그를 하고 있다며 깔깔대며 놀렸을 텐데.


 구독자 수 만 명을 달성하고부터 매일 구독자가 하루에 만 명씩 늘었다. 2만에서 멈추겠지, 3만에서 멈추겠지 하던 내 예상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떡상'을 한지 열흘 만에 결국 구독자 수 10만 명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난 하루에 한두 명씩 '유튜브에서 네 영상을 봤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보다도 더 내 성장세를 신기해하고 기뻐했다. 나는 혹시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일이 꿈일까 봐 밤마다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거의 열흘 내내 나는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깨도 깬 것 같지 않은 생활을 했다. 너무 좋은데,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건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기세를 유지하며 구독자 수가 늘고 있다. 아직도 꿈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천천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아직도 밤이 되면 쉽게 잠에 들기가 힘들고, 잠에서 깰 때마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댓글을 찾아 읽기 급급하지만, 그래도 나는 천천히 나아질 것이다. 이 유명세와 인기도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그리워할 지금을 최대한 누릴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가 많이 보고 싶다. 누가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난 내가 이렇게 좋은 성과를 얻은 것이 그 아이의 도움 없인 불가능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가족이 죽으면 키우던 아이들이 마중 나온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될 그 아이에게 꼭 속삭여줘야지. 너는 나의 자랑이었고, 나 또한 너의 자랑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그러니 우리 이제, 이곳에서 행복만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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