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개월간의 동남아 4개국 여행을 마친 나는 마침내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마지막 도시 방콕에 도착했다. 나는 네 달 전에 베트남행 티켓과 같이 비행기표를 미리 끊어둔 덕분에 고작 23만 원 정도로 방콕에서부터 런던까지 가는 직항 비행기를 예매할 수가 있었다. 비록 방콕 공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로 계속 연착이 되어 13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큰 일정도 계획도 없는 배낭여행자인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깨끗하고 넓은 공항에서 항공사에서 준 밀쿠폰으로 공짜로 밥을 먹고 공항 의자에서 공짜로 눈을 붙일 수 있어서 밥값과 숙박비가 굳는다는 점이 좋았다. 역시 세상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약 9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나는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오랜 기간 유학도 했고 가본 나라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 범위가 아시아권에만 국한되었던 나는 생에 첫 유럽행에 또다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남아에서 유럽친구들을 많이 만나보긴 했지만, 유럽에서 유러피안을 만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괜히 그들이 영어 발음이 좋지 않은 나를 비웃고 아시아에서 왔다고 무시를 할까 봐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잔뜩 주눅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익숙해지자 '이곳도 그냥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나는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집에서 머물렀다. 내가 중국에서 학부생으로 대학교를 다니며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왔을 때 사귄 친구인 동이는 부동산업을 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중국인 친구였다.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영국으로 가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그동안 동남아에서 지내느라 새까맣게 타버린 것도 모자라 공항 노숙 및 오랜 비행으로 거지꼴을 면치 못하고 있던 나를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녀는 방금 막 그녀의 집에 짐을 내려놓은 내게 그리운 고향의 맛인 너구리를 직접 끓여 대접해 주면서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런던에서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때 한창 런던 폭염 이슈가 있었던 때라 나도 내심 방문을 앞두고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막상 와보니 동남아에 비해 그곳은 정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에어컨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침저녁으론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태양이 남중하는 시간대에도 직사광선만 피하면 땀이 흐를 정도로 덥게 느껴지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점은 해가 떠있는 낮의 길이가 정말 엄청나게 길다는 거였다. 하루는 동이와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근처의 해변도시 브라이튼에 놀러 갔다가 돌아가는데, 하루종일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도 바깥이 훤해서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은 시각이라 굉장히 놀랐던 적도 있었다. '이래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던 거 아니야?'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런던이라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물가 상승이 살인적인 수준이라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런던의 물가는 정말 너무하다 싶었다. 아침식사로 근처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자고 하는 동이를 따라가서 선뜻 내가 계산을 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핸드폰에 찍힌 금액을 보고 나는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단한 파니니 샌드위치 2개와 생과일주스 2개 가격이 거진 5만 원에 육박했다. 여행을 떠난 후 처음으로 물가 때문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침이면 부지런히 일어나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간단한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도왔다. 집안일이 끝나면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요리를 해서 밥상을 차렸다. 그쯤이면 졸업논문 준비에 밤새 시달리던 동이와 동이의 룸메이트가 부스스 일어나서 같이 밥을 먹었다. 그건 한 달 월세와 관리비만 해도 한화로 700만 원에 육박하는 그 아파트에서 공짜로 재워주는 것에 대한 내 방식의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내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나에게 보람찬 일이었기도 하고.
내가 런던에 도착했던 첫날, 동이와 그녀의 룸메이트 샤샤는 나를 어떤 극장으로 데려갔다. 갑자기 영국에 오자마자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어리둥절한데, 심지어 그 공연은 참석하는 관중들에게도 의상제한이 있다고 했다. 일반적인 객석에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는 공연이 아닌 참석형 공연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 스토리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도록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는 80년대의 연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옷을 입어야 했는데 한낱 배낭여행자인 내게 그런 옷과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동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기 옷을 여러 벌 꺼내 놓더니 이것저것 내 몸에 대보면서 나와 잘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귀걸이, 가방, 신발까지 모두 거리낌 없이 내게 빌려주었다. 쇼핑을 즐겨하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은 모두 고가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서 나는 마치 그녀의 바비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참 황송했다.
영국에서 처음 본 그 연극은 강렬했다. 물론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도 한몫했지만,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녹아들며 참여하는 관중들에게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한창 대학로에서 활동했을 때 멀티녀 역할로 연극 무대에 서 본 경험도 있고 동료들의 공연도 자주 보러 다녔기 때문에 관객참여형 연극에서 관객이 쑥스러움 없이 자연스레 연기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관객들은 모두가 배우인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아닌가.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던 게 그 공연장엔 애초에 무대가 없었다. 호텔 연회장처럼 꾸며진 그 공간 전체가 무대였고, 이 공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배우였다. 나도 언젠가 한국에서 이런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하는 경험이었다.
처음의 그 경험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인지 나는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다른 공연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티켓값이 퍽 부담스러웠던지라 나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끝끝내 망설이다가 결국 티켓팅의 기회를 놓쳐버리곤 했었다. 그렇게 아쉬움만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한 극장에서 뮤지컬 <그리스>의 공연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물어보는 건 공짜니까.'라는 생각으로 나는 매표소로 다가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공연시간임박 반값티켓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바로 공연이 시작된다고 해서 나는 후회하고 말고 할 정신도 없이 직원을 따라 빈자리에 앉았다.
학창 시절에 뮤지컬배우를 꿈꿨지만 비싼 입시학원비용과 예대학비 때문에 부모님께 말도 꺼내보지 못했던 나는 역시 비싼 티켓값 때문에 뮤지컬 공연을 본 적도 많지 않았다. 그런 내가 런던의 대극장에서 이렇게 뮤지컬 공연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단전에서부터 뿌듯함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영어로 된 대사와 가사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뮤지컬이라는 장르 특성상 눈과 귀가 호강하니 그런 건 큰 문제가 안 됐다. 놀라운 부분은 공연이 끝나고 나서 이어졌다. 커튼콜이 진행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한 두 명씩 일어서더니 나중엔 결국 거의 모든 관객이 일어서서 배우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몇몇의 사람들은 박수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박수갈채와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꽤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연이 끝나면 배우들에게 진심을 담은 감사를 표현하거나 옆사람과 공연에 대한 감상을 나눌 틈도 없이 서로 먼저 공연장을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인데 이곳의 사람들은 누가 나가라고 등 떠밀기 전까진 나가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무대에 있는 배우들도 관객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 속에 담아두려는 듯이 벅찬 표정으로 그들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배우란 관객에게 에너지를 주기만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우에게 받은 에너지를 더 큰 감격으로 현장에서 돌려주는 관객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그 모습이 한국에 비해 훨씬 열려있고 서로 존중하는 형태의 공연 문화 같아서 부럽게 느껴짐과 동시에 마음 한쪽에선 무대에 대한 갈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낀 그 감정 때문인지 공연을 보기 위해 하루 식비보다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사실이 하나도 아쉽게 느껴지거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