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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05. 2023

12) 낭만, 그 아름답고도 순수한 이름에 대해서.

 

 런던에서 유럽 여행의 스타트를 끊은 나는 자연스레 다음 나라로 프랑스를 계획했다. 유로스타라는 해저터널을 통해 이동하는 고속열차를 타면 파리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알아보니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결국 파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비행기를 타고 라로셀이라는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휴양지를 가기로 했다.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그곳을 굳이 가기로 결정한 이유는 베트남 깟바섬에서 같은 게스트 하우스를 쓰며 알게 된 아드리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행 초반에 만났던 아드리앵을 3개월이나 지난 이 시점에 다시 만나니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유도선수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서 유도를 가르치는 일을 한동안 하다가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생활에 질려 다시 본인이 나고 자란 고향인 라로셀로 돌아왔다던 그는 그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고즈넉한 하얀 돌길이 잘 어우러지던 그곳은 여름휴가철을 맞아 피서를 온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버스킹 공연과 플리마켓들이 즐비해 있어서 그저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가 않았다.


 저녁때가 되자 그는 나를 그가 제일 좋아한다는 동네의 작고 허름한 술집으로 데려갔다. 양조장을 겸하고 있는 그곳은 직접 만든 술을 판매한다고 했는데, 그의 추천으로 과일로 만든 몇 가지 술을 맛보았더니 와인처럼 깊지는 않지만 과일의 달달한 맛과 독특한 알코올의 향이 잘 어우러져서 거부감 없이 술술 넘어갔다. 예전에는 고기잡이를 마친 어부들이 집에 가기 전에 들러서 술 한 잔씩을 걸쳤던 곳이라는 설명 덕분에 왠지 술맛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저녁이 되어서야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의 룸메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유도를 하며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던 그의 이름은 알렉스라고 했다. 아드리앵보다 나이가 많다고 했으니 나와 10살 차이는 났을 텐데 하고 다니는 행색이나 말투는 꼭 20대 초반의 느낌이었다. 유도선수로는 밥벌이가 시원치 않자 이곳에서 직접 개발한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던 그는 내가 그의 집에서 머무르는 것에 대한 어떠한 불편한 내색 없이 호탕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도 나처럼 워낙 여행을 좋아해 한국도 가봤다면서 잊을 수 없었던 홍대에서의 불금의 추억을 격양된 목소리로 찬양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와 영어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맑고 선한 그의 눈빛에서 그가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나마 런던에 있었을 때에는 한식이나 중식 위주로 식사를 할 수가 있어서 김치생각이 많이 나질 않았는데 자국민에게나 유명한 휴양지인 이곳엔 아시아 레스토랑 자체를 찾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였다. 게다가 외식물가가 너무 높아서 밥 한 번 밖에서 사 먹는 일이 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결국 아드리앵과 나는 마트나 시장에서 같이 장을 봐서 집에서 주로 밥을 해 먹었는데 그러다 보니 매일 먹는 음식이 같은 메뉴로 국한되었다. 아침엔 블랙커피에 치즈 바른 빵을 먹고 점심엔 파스타, 저녁엔 샐러드나 피자를 먹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인 나는 그걸 견뎌내는 게 또 하나의 고비처럼 느껴졌다.


 유러피안과 아시안의 차이는 그저 식습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루는 알렉스의 여자친구 로헝이 주말을 맞아 이곳에 놀러 왔는데 알렉스는 출근을 해야 해서 아드리앵, 나 그리고 로헝 셋이서 함께 낮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아드리앵이 우리에게 낚시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좋다며 따라나섰는데 알고 보니 낚싯대로 물고기를 낚는 낚시가 아닌 장화 신고 들어가서 조개를 줍는 것을 낚시(fishing)라고 말한 거였다. 아무튼 우리 셋은 자전거를 타고 아드리앵 부모님의 집에 들러 장화로 갈아 신은 다음 다시 해변으로 향했는데, 바다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나는 뭔가 잘못됨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아드리앵이 빌려준 장화가 너무 뻣뻣해서 걸을 때마다 종아리와 정강이를 긁는 거였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부터 뒤처지는 나 때문에 천천히 가는 게 미안해서 짧은 다리로 열심히 페달을 밟았던 나는 바다에서도 그들에게 짐이 될까 봐 아픈 걸 숨기고 부지런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나의 이런 노력과는 달리 그들과 나의 거리는 좀처럼 좁힐 수가 없었다. 아드리앵은 운동이 생활화된 남성이니 차치하더라도 로헝은 나와 같은 여성이었지만 기골이 장대한 게 나는 도저히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나도 운동을 했던 자존심이 있어서 그들 앞에서 너무 약골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국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나는 체력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무엇하나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는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따라잡으려 무던히 애를 썼던 뱁새 같은 나의 정강이와 아킬레스건 부근엔 장화에 피부가 갈려서 남은 상처가 결국은 흉터가 되어 남았다. 나는 그걸 애쓴 게 안타까워서 신이 내게 남겨준 훈장으로 여기기로 했다.


 아드리앵과 알렉스는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닌 한국인 여자애인 나를 생각보다 극진히 챙겨주었다. 해가 좋은 날엔 아드리앵과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생과일로 만든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바닷바람을 맞았다. 저녁이면 다 같이 해변으로 가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달빛 아래 보드게임을 즐겼다. 페탕크(pétanque)라는 우리나라의 구슬치기 격인 프랑스 전통놀이를 할 때에도 그들은 나를 빼놓지 않았다. 아드리앵이 집을 비우는 날이면 알렉스는 자기 친구랑 약속이 있었어도 나를 데리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시간들을 공유하며 국적, 인종, 성별, 나이를 뛰어넘은 특별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드디어 라로셀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출발하기 위한 짐을 꾸리고 마지막으로 알렉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아드리앵의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렇게 알렉스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프랑스어로 알렉스와 짧은 대화를 나눈 아드리앵이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알렉스의 매장으로 향하게 된 나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차에 타서 열어보니 쿠키, 초콜릿, 여행용 쨈 등 내게 짐이 되지 않으면서 성의를 표현할 수 있는 물건들로만 그가 고민해서 고른 점이 느껴져서 순간 마음이 뭉클했다. 아름다운 도시 라로셀에는 아직 낭만을 간직한 채 순수한 삶을 사는 그런 청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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