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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l 23. 2022

[그때 그 노래] #10

나를 만지면, 행복해질 거야 - Memory

1981년 초연되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랑받는 뮤지컬이 된 ‘캣츠(Cats)’.


캣츠 넘버들은 ‘황무지(The Waste Land)’ 유명한 영국 시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 나오는 14편의 시를 기초로 해서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트레버 (Trevor Nunn) 가사를 만들고 뮤지컬 작곡가  제작자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 곡을 무대화되었다.


그중에서 누구나 알고 또한 사랑하는 노래 ‘메모리(Memory)’의 가사는 트레버 넌이 엘리엇의 미발표 작품 ‘Grizabella the Glamour Cat’을 토대로 썼고 그의 다른 시 ‘Rhapsody on a Windy Night’과 ‘Preludes’에 나오는 표현들도 활용했다고 한다.


뮤지컬에서 이 '메모리'를 부르는 건 늙어 죽음이 멀지 않은 고양이 그리자벨라(Grizabella)이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 동료 무리를 떠나 제멋대로 살다가 돌아온 그녀는 다리까지 절면서 초라한 행색이다. 고양이들 대부분이 경계하며 냉대하지만, 그리자벨라는 '메모리'를 부르고 나서 새로운 생을 누릴 기회를 얻는 단 한 마리의 고양이로 선택된다.


‘메모리'는 수많은 가수가 멋지게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아래 두 곡은 놓치기 아깝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른 '메모리'


미국의 ‘국민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1981년 앨범 ‘Memories’에 첫 곡으로 실린 노래. 그녀의 시원하면서도 감수성 풍부한 목소리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무더위를 싹 씻어 주는 듯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MWoQW-b6Ph8

한밤중, 거리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Midnight, not a sound from the pavement)
달은 기억을 잃은 걸까?(Has the moon lost her memory?)
홀로 미소만 짓고 있네(She is smiling alone)
등불 아래, 시든 나뭇잎들은 내 발밑에 쌓이고(In the lamplight, the withered leaves collect at my feet)
바람이 신음하기 시작하네(And the wind begins to moan)
추억, 달빛 속에 완전히 홀로(Memory, all alone in the moonlight)
오래전 날들을 꿈꾸듯 떠올릴 수 있어(I can dream of the old days)
그때는 삶이 아름다웠지(Life was beautiful then)
행복이 무언지 알았던 그때를 기억해(I remember the time I knew what happiness was)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나게 해(Let the memory live again)


가사를 음미할수록 노래 속 주인공의 고독한 모습이 ‘한밤중, 적막함, 달, 가로등, 낙엽, 바람, 추억’으로 이어지며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예전에는 삶이 아름답다고 여겼고, 행복이 무언지도 알았던 주인공이, 지금은 적막한 한밤중에 잠들지 못하고 혼자 깨어 있다. 그녀처럼 깨어 있는 건 말없이 미소만 짓는 달님뿐. 낙엽이 발밑에 쌓이고, 이윽고 바람이 신음하듯 불어온다.


모든 가로등이 깜빡거리며(Every street lamp seems to beat)
숙명론적인 경고를 던지는 것 같아(A fatalistic warning)
누군가가 중얼거리고, 가로등은 바지직, 꺼지네(Someone mutters and the street lamp sputters)
그리고 이제 곧 아침이 될 거야(And soon it will be morning)


불빛이 당장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릴 때마다 ‘탁탁, 직직’ 소리 나는 구식 가로등이 연상된다. 옛날을 회상하며 홀로 헤매는 그녀에게는 가로등의 이런 규칙적인 깜빡임과 소음조차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나 보다. 숙명론적인, 혹은 운명론적인 경고(a fatalistic warning)란 이런 것일까?


‘애써 봤자 소용없어. 네 생은 그렇게 곧 꺼질 것이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 운명을 거역할 순 없어.’


노래 속의 늙은 여인은 숙명론적인 이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새벽,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려야만 해(Daylight, I must wait for the sunrise)
새로운 삶에 관해 생각해야만 해(I must think of a new life)
절대 굴복하면 안 돼(And I mustn’t give in)
새벽이 오면, 이 밤도 하나의 기억이 될 거야(When the dawn comes, tonight will be a memory too)
그리고 새날이 시작되겠지(And a new day will begin)
희뿌연 낮의 타고 남은 끄트머리(Burnt out ends of smoky days)
퀴퀴하고 차가운 아침의 냄새(The stale, cold smell of morning)
가로등은 꺼지고, 또 하룻밤이 끝났네(A street lamp dies, another night is over)
또 다른 하루가 밝아오네(Another day is dawning)


그녀는 갑자기 다시 힘을 낸다. 새로운 삶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고(I must think of a new life),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I mustn’t give in). 가로등이 꺼졌다는 것은, 밤이 끝났다는 것. 담배처럼 다 타 버린 낮, 담뱃재처럼 완전히 소진돼 녹초가 된 밤이었지만, 그 속으로 또 다른 하루가 밝아오려고 한다. 그녀는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마침내 무수히 반복되던 낮과 밤에서 오늘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먼저 그 태양의 첫 빛(daylight)을 목격하는 존재가 된다.


나를 만져봐, 나를 떠나는 건 아주 쉬워(Touch me, it’s so easy to leave me)
완전히 혼자야, 내 빛나던 날들에 관한 기억만 있을 뿐(All alone with the memory / Of my days in the sun)
나를 만지면 행복이 뭔지 알게 될 거야(If you touch me, you’ll understand what happiness is)
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잖아(Look, a new day has begun)


바브라의 노래와 뮤지컬의 넘버 양쪽 다 ‘Touch me’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나온 세월과 얼마 남지 않은 생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외로움, 불안함, 절망, 끝까지 놓지 못하는 희망까지, 응축되었던 온갖 감정이 이 대목에서 단 한마디로 터져 나온다.


이 생이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아는 것과, 그 끝이 실제 목전으로 다가왔음을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리라. 생의 끝을 앞에 두고 노래의 주인공은 자신을 만지라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절규한다. 그녀의 생애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는 존재를 어루만지며 온기를 나누는 순간에 있었던 것일까? 그 행복을 떠올리는 사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밤이 끝나 또 하나의 기억으로 저장되고,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새로운 아침이, 또 하루가, 어느새 시작되었다.


일레인 페이지가 부른 '메모리'


뮤지컬 ‘캣츠’의 제1대 그리자벨라인 일레인 페이지(Elaine Paige)가 부르는 Memory도 훌륭하다. 그리자벨라는 1막의 마지막과 2막의 후반부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1막 노래의 가사는 앞서 들은 바브라의 노래와 흡사하지만 조금 짧게 끝난다. 2막의 노래는 초반부 가사가 다르다. 2막에서 그리자벨라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지쳐 주저앉자, 고양이들 가운데 가장 어린 제미마(Jemima)가 격려하듯 한 소절을 불러주고, 그에 힘을 입어 그리자벨라는 다시 일어서서 제미마와 함께 노래하며 절정 부분을 열창한다.

https://youtu.be/mdBVJbzkoqo

추억, 달빛을 향해 얼굴을 돌려봐(Memory, turn your face to the moonlight)
추억이 당신을 이끌도록 해봐(Let your memory lead you)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Open up, enter in)
거기서 행복의 의미를 찾는다면(If you find there the meaning of what happiness is)
그러면 새로운 생이 시작될 거야(Then a new life will begin)


추억, 달빛 속에 완전히 홀로(Memory, all alone in the moonlight)
오래전 날들을 향해 미소 지을 수 있어(I can smile at the old days)
그때 나는 아름다웠지(I was beautiful then)
행복이 무언지 알았던 그때를 기억해(I remember the time I knew what happiness was)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나게 해(Let the memory live again)


희뿌연 낮의 타고 남은 끄트머리(Burnt out ends of smoky days)
퀴퀴하고 차가운 아침의 냄새(The stale, cold smell of morning)
가로등은 꺼지고, 또 하룻밤이 끝났네(A street lamp dies, another night is over)
또 다른 하루가 밝아오네(Another day is dawning)


새벽,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려야만 해(Daylight, I must wait for the sunrise)
새로운 삶에 관해 생각해야만 해(I must think of a new life)
절대 굴복하면 안 돼(And I mustn’t give in)
새벽이 오면, 이 밤도 하나의 기억이 될 거야(When the dawn comes, tonight will be a memory too)
그리고 새날이 시작되겠지(And a new day will begin)


제미마: 여름날 나무들 틈으로 비치는 햇살(Sunlight, through the trees in the summer)
끝없이 펼쳐지는 가장무도회(Endless masquerading)
함께: 동틀 무렵의 한 송이 꽃처럼(Like a flower as the dawn is breaking)
그 추억이 시들어가네(The memory is fading)


나를 만져봐, 나를 떠나는 건 아주 쉬워(Touch me, it’s so easy to leave me)
완전히 혼자야, 내 빛나던 날들에 관한 기억만 있을 뿐(All alone with the memory / Of my days in the sun)
나를 만지면 행복이 뭔지 알게 될 거야(If you touch me, you’ll understand what happiness is)
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잖아(Look, a new day has begun)



기억, 추억, 그리고


노래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만일 추억할 기억을 모두 잃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여전히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옛 기억뿐 아니라 자신이 평생에 걸쳐 일구고 저장해온 정보들을 불러오는 법을 잊게 된 사람이라면 말이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어느 날 그 추억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캄캄해진다면, 그 내면에는 기억 대신 무엇이 자리 잡게 될까?


한껏 부풀어 올랐던 감성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이 질문노래의 여운만큼이나 오래 머릿속을 맴돈다.


다시뉴스 필진 최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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