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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Aug 10. 2022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죽음과 인간의 관계


                                                       

 영혼은 인간의 영원한 주체인 사랑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사랑이 없는 인간은 영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사랑 또한 인간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사랑과 죽음은 늘 공존하면서 살아간다.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바티유(1897~1962)는 “에로스는 죽음에 이르는 삶의 희열”이라고 했다. 사람은 사랑을 나눌 때 짧은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참고)

 실제로 사람들은 사랑을 나눌 때 절정의 극치에서 상대 안에 자신을 완전히 녹여버리고 싶어 한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는 情事를 하면서 죽어가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인간의 희열이 가장 극치에 다다랐을 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행복감과 쾌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 사랑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정도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고대 그리스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군대가 존재했다. 그리스 중부 도시인 테베에    300 명의 애인들로 편성된 ‘신성대(神聖隊)’라는 군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투하기 전에 항상 에로스 신에게 공물을 바쳤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연인과 함께 출전해 잇단 승리를 거두다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했는데, 정복자 필리포스는 그 부대가 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말을 듣고는 애처로운 그들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필경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알고 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참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려 한다. 아무리 속으로 두렵고 겁이 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은 용기 있는 존재로 비치고 싶어 한다. 가장 고결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군대의 군인들은 전쟁에서 목숨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켜주려고 했다.  (『알고 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참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고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던 미소년 노예 안티노우스는 사랑하는 황제를 위해 재물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언이나 마술에 관심이 많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수명을 늘리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황제 대신 죽을 사람이 필요했다. 다른 노예들은 죽음이 두려워 모두 거부했지만 안티노우스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알고 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참고)

 그것을 보면 사랑의 힘은 정말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도 사랑이 있으면 조금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의 도움으로 승리한 영웅 유디트의 이야기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가장 치명적으로 나타낸 이야기이다.

 유디트는 구약성경 외경에 나오는 인물로 이스라엘의 배툴리아에 사는 아주 아름다운 과부였다. 유디트는 하느님을 크게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에 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다(Judae)를 정복하려고 배툴리아를 포위하였다. 34일 동안 포위당한 이스라엘인들은 기근과 갈증으로 항복하려 한다. 이때 유디트가 나서 원로들을 꾸짖고 자신의 계략을 밝힌 후, 시녀와 적진으로 가서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다. 유디트는 적진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반한 홀로페르네스가 만취한 틈을 타 그의 머리를 자르고 성벽에 걸어 놓았다. 아시리아 군대는 달아나고 유태인들은 유디트를 충성스럽고 고귀한 여성, 성녀로 여기고 있다. (『클림트, 황금빛 유혹』참고)

 이때부터 큰 칼과 남자의 잘린 머리는 유디트의 상징이 되었는데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런 유디트를 성적 매력을 강조한 팜므파탈로 그려냈다.

 “유디트의 눈 속에는 일렁이는 불길이 숨겨져 있다. 남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매혹적인 여인, 그녀가 지그시 이쪽을 바라본다. 이가 드러나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미소는 몸 안에 흐르는 신비로운 힘을 느끼게 한다. 한쪽 가슴은 베일에 가려 은근하게 비치고, 다른 한쪽 가슴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가슴보다 더 감적인 배꼽은 지난밤을 기억하고 있는 듯 아직까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취한 듯 몽롱한 유디트의 눈길이 가는 곳에는 그녀의 왼손에 들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이 들려 있다. (『클림트, 황금빛 유혹』참고)

 그런 유디트 1은 클림트의 1901년도 작품인데 죽음과 성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 그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올만치 섬뜩하다.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을 클림트는 특유의 황금빛으로 몽환적 분위기를 그려낸 것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eros와 thanatos를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홀로페르네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격렬한 사랑의 분위기에 빠져 있었던 그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사랑에 취했을 때의 인간은 죽음에 대한 아무런 거부의 반응도 느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eros와 thanatos의 관계는 클림트와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전체를 사로잡았던 주제였다. 생명과 그것의 에로틱한 표현은 항상 eros와 thanatos 사이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홀로페르네스는 유디트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유디트를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을 치명적인 성적 매력이 유디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대부분이 홀로페르네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한다.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없어 함께 동반 자살을 하는 것만 봐도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죽는 사람들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을 것이다. 죽어서 다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이번 생에 못다 이룬 사랑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위대한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 가는 길인 줄을 알면서도 배심원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맞섰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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