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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날이 Jun 30. 2022

<탑건: 매버릭>에 대한 논평

여전히 질주하는 톰 크루즈를 보며

베트남 전쟁 실패 이후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코체프의 <람보> 등의 정신적 불안을 호소하고, 악인처럼 묘사되는 미군에 대한 할리우드의 폭로적 영화들에 대한 반발로 인해 미군은 <탑건>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군은 F-14와 항공모함을 적극적으로 투입시키며 <탑건>에서 다시 한 번 "위대한 미국"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수천만 달러의 전투기들이 보여주는 공중전은 로널드 레이건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과 함께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스펙타클을 다시 한 번 만들어냈다. 푸른 하늘에서 화려한 공중제비를 돌고 적 전투기에 미사일을 맞추기 위해 시시각각 방향과 위치를 바꿔내는 F-14의 모습은 미 해군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마음껏 분출해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미국 이야기 한 복판에 주인공인 톰 크루즈가 있었다. 피트 미첼, 일명 '매버릭'이라는 역할로 등장한 톰 크루즈는 <탑건>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마지막 스타The Last Movie Star"로 불리는 전설적인 배우가 되었다. 톰 크루즈가 신인 배우에서 전설이 된 것처럼 미 해군 최고의 파일럿, 탑건의 졸업생이었던 매버릭이 미 해군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되어 <탑건: 매버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할리우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디지털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었고, 이제는 배우의 얼굴 따위도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향하지 않고,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PC로 영화를 본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실제 전투기와 항공모함의 출현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푸른 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전투기들의 도그파이트가 보여주는 현전성의 이미지보다는 컴퓨터CGI가 만들어내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시뮬라크럼(원본 없는 이미지로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보았다.)이 최근의 할리우드에서 지배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상황은 <탑건: 매버릭>의 다이제틱diegetic 공간에서도 유사하게 펼쳐진다. 매버릭은 여전히 전설로 불리지만, 더 이상 해군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제독들은 전투기 조종사에 투자할 돈으로 무인 드론에 투자하고 싶어하고, 전역도 하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이다. 이제 해군의 입장에서는 '매버릭'은 '아이스 맨'과 함께 찍힌 사진처럼 유물이 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It`s not the plane, it`s the pilot"이라는 매버릭의 대사는 하나의 반동적 언구이다. 

그렇다면 <탑건: 매버릭>은 동시대의 문화적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반동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동시대의 가장 잘나가는 블록버스터 감독의 특징으로 이야기되고는 한다. "CG를 싫어하는 감독",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실제 비행기와 건물을 폭파시키는 감독" 등 놀란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언구들이다. 그러나 놀란의 영화들과 <탑건: 매버릭>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놀란은 <인셉션>에서 실제 과일들을 폭파시키고, <다크나이트>에서 스포츠카를 폐차 시키는 등 집요하리만치 카메라 앞의 사물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놀란은 카메라 앞의 현실-대상을 어떻게 재현해낼지에 대해선 언제나 시큰둥 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현실-대상에 대한 집착증은 영화의 서사와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캐릭터들은 소외된 존재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그의 스토리는 언제나 "반전"이라는 두 글자만을 물신적으로 탐한다. <테넷>은 놀란이 보여주는 집착의 결정판이었던 듯 싶다. <테넷>에서의 사물들과 인물들은 유기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각각이 따로 논다. 영화 전체를 보았을 때 큰 줄기의 서사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이야기들이 따로따로 보여진다.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는 놀란의 충고는 감독 자신도 <테넷>이 서사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듯 하다. 이런 점에서 놀란의 태도는 반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증상과도 같다. 


여기서 잠시 욕망과 충동의 정신분석학적 구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크 라캉을 헤겔적으로 해석한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카페]](Less than Nothing을 두 책으로 편집해서 출간된 시리즈의 2부)라는 책에서 욕망과 충동의 구분을 설명한 바 있다. 지젝은 라캉의 욕망과 충동 분석 모두 "대상과 상실 사이의 관련성"과 연관되면서도 확연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욕망은 대상 원인으로서의 대상 a의 상실을 우리가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대상과 일치시키며 그 잃어버린 것을 채우기 위한 끝없는 물신주의적 태도이다. 그러나 충동의 대상은 "상실 그 자체"이다. 충동은 잃어버린 대상을 채우기 위한 무한적 구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동은 "상실-간극, 절단, 거리-자체를 직접적으로 구현하려는 분투"이다. (책의 1132 페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현실의 문제로 다시 이야기해볼 수 있다. 욕망과 충동의 구분은 현실에 대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충동으로 비유해본다면, 욕망은 끝없이 현실-대상을 필요로 하는 현실-대상, 즉 사물에 대한 무한적 추구이다. 반면, 충동은 현실-대상의 상실 그 자체이다.  현실-대상에 대한 충동을 "리얼리즘"으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즘은 단순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반영보다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반영이다. 즉,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완전한 반영의 실패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현실에 대한 허구적 시도이다. 그렇기에 리얼리즘은 관객의 이미지와 카메라 앞 대상 사이의 상상적 동일성을 만들어내며, 관객과 영화 사이의 유기적 해석과 경험이 가능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놀란의 이미지는 현실-대상에 대한 욕망이다. 즉, 놀란의 카메라 앞 사물에 대한 태도는 집착적으로 현실-대상을 추구하는데 그친다. 놀란의 영화에서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해석과 상상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은 다르다. <탑건: 매버릭>은 놀란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확연히 반동적이다. 그렇다면 놀란의 영화들과 다르게 이 작품이 반동적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톰 크루즈라는 "마지막 스타"의 존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톰 크루즈의 존재는 영화에서 실로 어마어마하다. LA Weekly에 의하면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스타 시스템의 붕괴 이후로 배우의 존재만으로 영화의 흥행과 홍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마지막 배우는 톰 크루즈이다. 그런 톰 크루즈가 36년 만에 후속작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탑건: 매버릭>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일 것이다. <탑건>을 몰랐던 관객들도 톰 크루즈라는 스타 한 명 때문에 <탑건: 매버릭>을 보러갈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의 진정한 매력은 톰 크루즈가 살아 숨쉬고 있는 그 이미지들을 온전히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리얼리즘의 문제이다. 

이제 <탑건: 매버릭>의 영화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초음속 전투기 다크스타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군생활을 이어가던 매버릭은 강제전역을 눈 앞에 두고 옛 친구 ‘아이스맨’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탑건으로 발령받는다. 그러나 이번엔 전투기 조종사로 전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식적인 전투기 조종법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기밀 작전을 위해 선발될 젊은 탑건 졸업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관이 조종사로서의 매버릭의 마지막 미션이다. 더군다나 전투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파트너였던 ‘구스’의 아들, ‘루스터’가 이번 작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버릭은 더욱 마음이 급하다. 구스에 이어 루스터까지 떠나보내는 것은 매버릭 입장에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버릭은 탑건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도그파이트를 진행한다. 두 대의 전투기 사이를 돌파하는 매버릭의 전투기, 전투기 위로 뒤집어져서 누운채 비행하는 장면, 등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공중묘기는 실제 전투기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장면은 이 다음이다. 


아이스 맨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후 더 이상 매버릭을 지켜줄 방패막은 해군에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매버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 '사이클론'은 방패막이 사라지자마자 매버릭을 전역시킨다. 그러나 매버릭은 알고 있다. 지금의 대원들의 상태로는 미션에서 살아돌아 올 수 없다. 이제 겨우 팀으로 뭉쳐진 대원들은 여전히 작전의 성공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때 매버릭이 다시 등장한다. 작전의 성공가능성에 대한 대원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매버릭은 다시 한 번 전투기 위에 오른다. "Talk to me, goose"라는 매버릭은 2분30초라는 시간 안에 적의 우라늄 시설에 도달해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하고 의식을 잃을만큼의 강력한 중력을 이겨내고 살아돌아 올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시연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차곡차곡 진행된 서사의 최고의 긴장상태에서 펼쳐지는 매버릭의 시범 비행 장면은 관객들을 톰 크루즈라는 배우의 숨소리와 움직임에 맞추어 숨쉬게 만든다. 매버릭의 시범 비행 장면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강렬함은 영화관의 모든 관객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며 톰 크루즈라는 스타의 비행에 감응하게 만든다. 사실 필자는 동시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대중영화에서 이렇게 강력한 감응을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이러한 감응은 서사와 이미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제 모든 관객들은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매버릭을 믿게 된다. 영화적 이미지가 여전히 강렬함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수많은 관객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음을 말이다. 가장 대단한 점은 이 영화가 오랜만에 불러낸 물음이다. "도대체 이런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가 아닌 "도대체 이런 이미지를 어떻게 찍었을까?"라는 물음 말이다. 이런 점에서 <탑건: 매버릭>은 다시 한 번 카메라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의 강렬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서사라는 측면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게 해준다. 카메라라는 자동기계가 만들어내는 사진적 이미지로부터 발명된 "영화"는 분명하게도 이미지의 예술이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이미지의 언어만 존재하는 예술이 아니다. 이는 영화라는 예술의 특이성 때문이기도 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탈리아의 존재]라는 글에서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서 영화라는 예술이 갖는 역사적 특이성은 영화의 역사에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라는 역사적 구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제임슨에 의하면, 유성영화는 무성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문법과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이유로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를 별개의 예술처럼 언급하기도 한다.) 유성영화의 발전은 문학이라는 매체를 빠르게 포섭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서사는 가장 강력한 영화적 형식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촬영된 F/A-18 슈퍼 호넷과 슈퍼 호넷에 탑승한 배우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만큼 <탑건: 매버릭>의 서사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하나의 공명점을 만들어낸다. 


<탑건: 매버릭>은 두 가지 서사적 동기를 갖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전작인 <탑건>과 연결되며, <탑건>을 작동시켰던 동기를 계승, 발전시켰다. 첫째로, <탑건>에서 매버릭의 스토리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 '구스'의 죽음은 그의 아들 '루스터'의 존재로 전환된다. 친구의 죽음으로부터의 죄책감과 감사함 속에서 성장한 매버릭은 그의 아들 '루스터'에게 부재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대신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친구라는 존재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로의 성장은 매버릭을 단순히 하나의 스토리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갈등관계 속에서 또 하나의 동기는 영화의 외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대립되고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다. 매버릭은 아날로그를 대표한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직접 전투기를 조종해온 매버릭은 작전의 성공에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전투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조종사와 무인기를 넘어서 <탑건>과 <탑건: 매버릭>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내적긴장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탑건>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전쟁 이후 위태로워진 미국의 위상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과시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탑건: 매버릭>은 자신의 전작이 지니고 있었던 그 모티프를 경계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달라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작동시킨다.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것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언제나 각인시킨다. 그런 방식으로, 자본주의는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곧 전세계의 미국화였고, 반대로 미국의 전세계화를 만들어냈다. 미국기업들이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끼치는 영향력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미국 자본주의의 침략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화 더불어 디지털 파생상품의 출현, 플랫폼 노동의 확대는 더 이상 자본주의라는 것을 인식조차할 수 없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그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여전히 우리가 미국 이데올로기 속에서 전세계로 퍼진 미국식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탑건: 매버릭>은 동시대의 리얼리즘 영화이다. 이런 의미에서 <탑건: 매버릭>은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저항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음에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총체적 인지가 가능하게 해주는 반동적 영화이다. 


<탑건: 매버릭>은 히어로 장르가 지배하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그린스크린을 활용한 컴퓨터 CGI가 아닌 오랜만에 제작된 현실-대상을 촬영한 액션 장르 영화이다. 분명 디즈니의 마블 영화들이 개봉때마다 영화관을 휩쓸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했던 영화는 톰 크루즈라는 스타, 서사가 주는 드라마, 스펙터클 이미지,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런 영화이다. <탑건: 매버릭>은 관객들을 스트리밍 플랫폼의 알고리즘으로부터 탈출시켜 다시 영화관으로 향하게 할 영화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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