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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날이 Jul 14. 2022

히토 슈타이얼을 말하다

두 가지 쟁점들과 <야성적 충동>

히토 슈타이얼은 동시대의 미술계에서 영상을 제작하는 작가 중 가장 매력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쓴 글, 그녀가 제작한 영상들은 미술 혹은 영화라는 예술을 꿈꾸는 학생, 비평가, 제작자 할 것 없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녀의 작업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연구자들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몇 페이지의 분량이 필요할 것이다.(필자 역시 논문에서 그녀를 다룬 바 있다.) 이처럼 히토 슈타이얼이 끼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22년 4월 29일부터 9월 18일까지 열린 그녀의 첫 개인전은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며, 상영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연계 강연까지 진행되었다. 슈타이얼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라는 개념을 통해 디지털 이미지의 무한한 조작 가능성과 무한한 유통 가능성이 동시대 자본주의의 디지털 상품에 적극적으로 포섭되지만, 그 상품화는 변증법적으로 동시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슈타이얼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슈타이얼의 작업은 영화적인가? 슈타이얼의 작업은 해방적인가? 이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히토 슈타이얼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어보려는 시도인 동시에 그녀의 작업에 대한 비평적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슈타이얼의 작업은 영화적인가?


슈타이얼의 작업이 영화적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녀의 미학적 실천을 역사적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좋은 지형도를 만들어줄 것이다. 슈타이얼의 영화가 영화적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영화cinema에서 포스트 영화post-cinema 혹은 포스트 시네마로의 이행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포스트 시네마로의 이행은 필름의 소멸 이후 비디오, 및 디지털과 같은 새로운 시각매체의 출현이 불러온 시각성, 관객성, 그리고 이미지 그 자체 등을 포함한 다양한 변화들로 인해 야기되었다. 그러나 포스트 시네마를 단순히 영화와의 단절로 보는 것은 포스트 시네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듯이 보인다. Post-Cinema의 편집자인 줄리아 레이다와 셰인 댄슨은 책의 서론에서 포스트 시네마가 단순히 영화와의 단절이 아닌 영화와의 연결, 영화에 대한 존경, 오마쥬 등을 담고 있는 복합적 개념임을 이야기한다. 즉, 포스트 시네마는 영화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여전히 영화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화적이려고 한다는 것이 레이다와 댄슨의 주장이다. 디지털 모방digital mimicry라는 필립 로젠의 개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로젠은 디지털 이미지가 제작되는 과정이 필름 이미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지라도, 디지털 이미지는 여전히 필름 이미지와의 유사성을 추구하고 모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의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들은 여전히 필름 이미지가 갖고 있던 증거적 권위를 미약하게나마 지니고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가 군사적으로 사용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 시네마는 이러한 연결성만큼이나 영화와의 현격한 단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는 비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디지털 기술이 갖고 있는 매체적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술들이 보여주고 있는 적극적인 관객과의 상호교류, 즉 리모컨 혹은 컴퓨터를 통한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 반응은 필름 기반의 영화와는 현저히 다른 관객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의 옴니버스 영화인 Atom Egoyan의 <동시 상영 세 편 Artaud Double Bill>은 이러한 새로운 관객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레프 마노비치나 스티븐 샤비로와 같은 연구자들은 포스트 시네마가 거대한 스크린과 수동적 관객을 중심으로 하는 필름 기반의 영화와는 달리 능동적 관객성,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제작과정의 자율화,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정동”의 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필름과 이후 시각매체들 사이의 연결과 단절의 긴장 관계는 영화계뿐 아니라 미술계의 영상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앤디 워홀, 백남준 등과 같은 다양한 작가들은 필름을 넘어서 비디오, 디지털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전시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시각매체들의 등장은 하룬 파로키, 장 뤽 고다르와 같은 영화 감독들에게도 영상을 통한 실험적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히토 슈타이얼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영상을 만드는 작가이다. 즉, 그녀의 작품은 철저히 포스트 시네마적인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21세기 이후의 그녀의 작품들을 지배하는 것은 컴퓨터를 통한 디지털 이미지이다. 그녀가 “빈곤한 이미지”라고 이름 붙인 그 이미지들은 금융자본주의의 유동성과 무한적인 상품화를 비판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들을 영화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 보인다. 유운성 평론가는 어디에선가 히토 슈타이얼의 책, [[스크린의 추방자들]]을 영화의 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물론 “포스트 시네마”라는 개념 속에 영화적이라는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기에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슈타이얼의 실천을 영화적이라고 한다면 슈타이얼의 작품들이 지니는 다양한 포스트 시네마적인 특징들을 특정 짓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유운성의 표현대로 히토 슈타이얼은 영화의 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작에서 히토 슈타이얼과 장 뤽 고다르를 비교하며, 장 뤽 고다르의 작품이 여전히 영화적인 이유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유운성의 비판처럼, 전통적인 영화 예술이 추구했던 거대한 스크린과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 사이의 관계는 슈타이얼의 작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일례로 슈타이얼은 영상만큼이나 영상과 함께 설치되는 전시물에 신경 쓰고 있다. <자유낙하>의 다큐멘터리적인 이미지들과 더불어 등장하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보다 눈에 띄는 것은 영상을 관람하는 관객들을 위해 설치된 비행기 좌석들이다. 이는 <태양의 공장>이라는 작품에서도 유사한데, 작품의 뮤직비디오만큼이나 파편적인 이미지들보다 눈에 띄는 것은 스크린 앞에 설치된 파라솔과 조명이다. 정신없이 편집된 슈타이얼의 작품처럼 관객들 역시 고정된 위치에서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향유한다.


그렇기에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은 영화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가 보이는 작품들은 파편적이며, 선형적 서사 혹은 수동적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물론 영화의 관객들을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운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슈타이얼의 작업들은 파편을 방기하고, 원심력을 보인다(유운성,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 [[미디어챕터2]]) 그렇다면 이제 슈타이얼의 실천이 영화보다 해방적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슈타이얼의 작업은 해방적인가?


포스트 시네마 담론은 정치적 모더니즘의 리얼리즘과 영화적 장치 비판을 이어서 포스트 시네마의 특징인 능동적 관객성을 영화와 가장 구별되는 해방적 특성으로 이야기한다.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들은 영화관의 영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슈타이얼이 제작한 XR 작품 <Dancing Mania>은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이 직접 경찰관, 거리두기, 감염률과 사망률 등을 조작하며 체험할 수 있는 바이러스, 현실, 통제에 대한 비판적 프로그램이다. 이 작품을 기반으로 제작된 <소셜심>에서 관객들은 <Dancing Mania>가 상영되는 커다란 방을 지나 짐볼 위에서 방방 뛰며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프란세스코 카세티는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관객성을 "수행performance"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카세티에 따르면, 필름 기반의 전통적인 영화 예술의 관객들이 수동적으로 영화의 서사를 따라간다면, 동시대 관객들은 디지털 이후의 새로운 기술들로 인해 더 이상 눈에만 국한되지 않고 선형적인 서사에 묶여있지 않는다. 카세티는 이를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뢰르 개념을 통해 이야기하는데,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뢰르는 정해진 논리를 따르지 않는 비규정적이고 임의적인 만들기를 하는 수행자들을 의미한다. 슈타이얼의 <이것이 미래다>는 포스트 시네마의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것이 미래다>는 싱글 채널 영상과 스크린 뒤에 설치된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들은 싱글 채널로 상영되는 작품들을 보다가 언제든지 스크린 뒤로 넘어갈 수 있는데, 여기서 관객들은 작품이 상영되는 동안 LED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파워 플랜츠>를 보게 된다. <이것이 미래다>가 끝난 뒤 스크린은 반투명상태로 전환되며 스크린 뒤에서 <파워 플랜츠>의 구조물들을 배회하는 관객들을 비추게 되는데, 이때 이 작품을 보던 관객들은 스크린에 상영되는 이미지 속의 인물들이 된다. 이렇게 관객들은 수동적인 관람에서부터 능동적인 배회로 이행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들이 수동적이었고,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영화와 달리 해방적인가이다. 즉, "슈타이얼의 작업이 해방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이에 다가가는데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출현을 계급의 해방으로 보았다. 즉, 계급적 해방으로 인한 신분사회의 붕괴로 인해 모두가 평등한 시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라는 것이 등장했고, 상품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자본주의적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변증법적 반전이 일어나는데, 자유롭게 상품을 사고팔며 화폐, 즉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자유와 평등은 결코 순수하지 못해 진다. 즉, 자유롭고 개인 주체, 바로 평등한 시민은 계급의 필연적 조건인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시민들은 상품을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사고팔며, 이로 인한 자본의 축적만을 추구한다. 자본의 축적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나누어지고, 노동자들의 노동 가치, 즉 상품의 가치의 척도인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은 완전히 추상화되어 '가격'이라는 숫자로 유통된다. 그렇기에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분석이 상품의 내용, 즉 가치가 어떻게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이 아닌 상품 형식을 통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분석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만들어낸 하나의 증상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즉, 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부르주아)의 맞은편에 존재하는 동시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착취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베일 뒤에 숨겨진 무엇 또는 허구 혹은 추상의 층위가 아닌 현실에서 작동하는 추상이다. 즉,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추상은 현실적 추상real abstraction이다. 그것은 분명 추상이지만 현실의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의 추상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기능하게 하는 동시에 현실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르크스적인 물신주의fetishism는 관념적 혹은 주관적 영역이 아니라 현실적 혹은 객관적 영역인 것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이 현실의 층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혀낸 유물론자이다.


마르크스가 분석해낸 자본주의의 물신주의, 즉 '그들은 그것을 모른 채로 행한다'는 동시대의 능동적 주체 혹은 능동적 행위라는 표어를 통해 완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VR, AR과 같은 뉴미디어의 능동적 관객성을 주장하는 포스트 시네마 담론은 자본주의의 물신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의 찬사가 바로 자본주의의 물신주의 그 자체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 자본주의 이후 자본주의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고,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이야기하는 것 역시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린 지금을 지배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끝없이 자기계발하는 개인들 밖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계급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되지 못하고, 모든 정치적 반동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단발적 행사에 불과해져 버렸다.(우리나라의 촛불 혁명이라고 불리는 단발적 행사는 단적인 예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들은 이러한 현실에 그대로 순응해버리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유튜브의 쇼츠나 인스타그램의 스토리와 같은 일회적인 파편에 불과하다.



3. 슈타이얼의 쟁점


슈타이얼의 작품은 그 일회적 파편에서 시작한다. 디지털 기술에 대한 비판과 가능성을 동시에 사유하는 슈타이얼은 이를 곧바로 지금의 현실, 즉 금융 자본주의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성좌를 만들어낸다. <유동성 주식회사>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유동성 주식회사>는 베트남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되어 미국으로 입양된 제이콥 우드를 보여준다. 우드는 격투기가 취미로 하며 미국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금융권의 투자 전문가였다. 그러나 우드는 2008년 경제 위기로 인해 해고가 되고 이 소식을 들은 격투기 협회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격투기 선수 겸 해설가로 활동하게 된다. 우드는 금융계와 격투기 사이의 상동성을 수많은 기술을 뒤섞어 각각의 상황에 따라 공격하고 방어하는 유동성에 있다고 말한다. 슈타이얼은 이런 우드의 삶을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여주며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들을 통해 파생상품과 디지털의 무한적인 유동성을 상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예술을 먹어라! 현대 예술과 파생파시즘]이라는 글에서 이에 대해 말한다. "단지 기반 구조나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진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인터넷이 모든 인류에게 균등하게 혜택을 주기 위해 사회주의나 자동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364) 이처럼 슈타이얼은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의 가능성을 단순히 믿지 않는다. 여기서 슈타이얼의 매력적인 지점이 등장한다. 슈타이얼은 단순히 천박하고 빈곤한 이미지들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자본주의의 판본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그녀는 자신의 자본주의에 대한 재현이 성공적이던지 천박스러우던지 끝없이 금융화 자본주의를 재현하려 시도한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원한 최근작 <야성적 충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총 4개의 채널로 구성되어 있는 <야성적 충동>은 하나의 중심 서사를 지니는 한 개의 채널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채널에서 상영되는 이미지의 서사는 이렇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스페인의 산골 마을에서 유튜브 스타가 된 양치기에 대한 리얼리티 쇼를 제작하기 위해 작은 마을로 들어온다. 그러나 TV 프로그램은 팬데믹으로 이내 중단되고 제작진들은 중단된 프로그램을 대신해 시청자들을 모으기 위해 "크립토 콜로세움"이라는 동물 전투 메타버스를 만들어낸다. 이 메타버스는 단순히 자극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의 주목을 끄려는 것을 넘어서 NFT 적자생존이라는 현실의 경쟁 시스템으로 둔갑해버린다. 이 메타버스에 저항하기 위해 마을의 양치기들은 산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구석기 벽화가 그려진 동굴에 찾아가 양치기들만의 힘을 찾아내는데,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 상호교류의 힘이다. 이를 통해 박테리아를 기반으로 한 "치즈 코인"을 만들어내고 양치기들은 적자생존의 메타버스에 강렬히 저항한다.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에서 영화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초반에 등장하는 우드의 인터뷰 정도를 영화적인 이미지라고 한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야성적 충동>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이미지는 천박한 유튜브 라이브, 어떤 정보가 기입되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동물 전투의 게임 이미지, 이를 포함하고 있는 인식조차 어려운 메타버스 이미지 등이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치밀하게 동시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거울을 보여주고 있다. 케인스의 "야성적 충동"이라는 용어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이 작품은 자본주의 혹은 동시대의 금융 시장보다는 유튜브와 리얼리티 쇼가 지배하고 있는 동시대의 시각 문화와 메타버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디지털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자본주의에 대한 작품인데, 포스트모더니티 이후로 경제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이 되었고 문화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슈타이얼이 보여주는 동시대의 시각 그리고 디지털 문화는 금융화 자본주의 그 자체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추상이 지배하는 세계가 비로소 완성된 것이 바로 지금의  금융화 자본주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렇게 슈타이얼은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 금융화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지형도를 만들어낸다.



유운성 평론가는 [반추천도서]를 통해 슈타이얼(뿐만 아니라 아감벤과 키틀러)의 "견해나 주장에 공감한다면 영화 같은 것은 더 이상 보지 않는 편이 좋다"고 까지 말한 바 있다. 필자 역시 그의 말에 공감한다. 슈타이얼의 작품들은 분명 천박하고 유운성의 말처럼 인스타그램의 휘발적인 이미지들과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만들어낸 모든 이미지들은 영화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을 전통적인 영화학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슈타이얼은 분명 영화의 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슈타이얼은 가장 효과적으로 동시대의 자본주의를 분석해내고 재현해낸다. 그녀가 만들어낸 천박하고 빈곤한 이미지들은 동시대 자본주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 자본주의의 변동성을 포착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기에 슈타이얼의 작품을 영화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관심 가져야 한다. 이것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 역시 슈타이얼의 작품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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