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진 향수를 쓰지 않았다. 향수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살게 됐다. 물론 향수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너도 대학에 갔으니 향수라도 좀 뿌리고 다니라며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적도 있고, 연인한테 선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향수를 쓰기 시작한 건 아내가 향수를 사준 이후부터다. 아령 모양의 패키지가 특이한 데다가 향도 어쩐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듯해서 종종 뿌리고 다닌다.
내 주변에서 향수를 꾸준히 쓰는 사람은 오직 딸의 수학 학습지 선생님뿐이다. 덕분에 향이 없는 집에 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향이 공간을 차지한다는 걸 알았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십 분여의 수업을 마치고 가고 나면 창을 열고 환기를 해야만 했다. 나중엔 그 향에 적응이 됐고 다행히 선생님도 지난 5년간 향수를 바꾸지 않았다. 그 사이에 자동차는 소형에서 중형으로 업그레이드 한 선생님이 향수를 안 바꾼 이유는 뭘까? 향수는 자동차보다 더 바꾸기 힘든 걸까? 향수의 역할이 도대체 뭐기에 그럴까? 이런저런 궁금증 끝에 이 영화가 떠올랐다.
향수의 의미
영화 <향수>가 나오기 전부터 파트릭 쥐스킨트의 팬이었다. <좀머 씨 이야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깊이에의 강요>등을 서른 전에 읽었다. 많은 책을 팔고 버리는 와중에도 아직도 갖고 있을 정도로 아끼는 작품들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은 고독하다. <콘트라베이스>에는 존재감 없는 외로운 베이시스트가 나온다. 그는 같은 악단의 소프라노를 짝사랑하지만 그녀는 그가 안중에도 없다. 그의 소외와 고독은 더 깊어진다. <비둘기>에선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새에 대한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나온다. <좀머 씨 이야기>를 통해선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고독과 그 고독한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순례자와 같은 삶을 말한다. 이 영화의 원작, <향수>에선 주인공 그루누이와 향수를 통해 이 모든 고독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다움, 그 사람다움이 차지해야만 하는 지리적/심리적 공간감,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유한 존재감에 대해 말한다.
<향수>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악취가 진동하는 생선 쓰레기 더미에서 인생을 시작한 주인공 그르누이에겐 체취가 없다. 이런 사람이 천재적인 향수 만드는 재주를 밑천 삼아 프랑스 각계각층 인간 군상 속에서 삶을 연명해 간다. 그러다 가장 완성하고 싶은 향수를 가진 사람을 만났고 그 향수를 만들기 위해 연쇄 살인마가 된다. 거칠고 간략하게 말하면 그런 이야기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체취가 없는 사람이 향수를 잘 만들며 살다가 갑자기 하나의 특별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 못 했다. 그저 그로테스크한 소설 정도로만 이해했고 한참 후에 제작된 영화도 그렇게 봤다. 이 소설과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건 몇 년 전 문화기획을 하는 후배와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할 때였다. 콘텐츠 소재가 후배가 산 물건의 쓸모를 논하며 후배의 씀씀이를 성찰하는 것이었는데, 한 에피소드에서 다룬 물건이 향수였다. 때 마침 당시 SNS에서는 이성을 유혹할 수 있다는 향수 광고들이 범람 중이었다.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난생처음 그 향수 광고와 함께 향과 향수의 쓰임새와 역할을 곰곰이 생각했다. 광고처럼 정말 이성을 유혹하는 향이 따로 있을까? 사람이 맘에 드는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겐 없는 그 사람만의 매력이 있다는 말인데, 향수와 향이 그 다른 매력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향수는 너무 많이 팔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청춘들의 연애에 이 향수가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 지역별 할당제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하다가 영화와 소설 <향수>의 의미를 알게 됐다.
사람다움의 요소
돌이켜보면 추억 속의 사람은 향기마저 기억된다. 그렇기에 다른 칼럼에도 썼듯이 누군가가 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때론 살아갈 힘이 되니, 누군가에게 선명하게 기억되고 싶다면 자신만의 고유의 향이 있는 것이 좋다. 모두가 같은 향을 갖고 있다면 구별되어 기억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향기, 한 사람의 체취는 그 사람의 “다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학 학습지 선생님이 향수를 안 바꾸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체취가 없는 그르누이는 사람다움이 없는 사람이다. 때문에 누군가의 곁을 스쳐 지나가도 존재는 체감되지 않는다. 부모한테 버려지고 뿌리조차 알지 못해서 무명의 존재인 것이 아니다. 체취로 상징되는 본연의 “사람다움”이 없기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고 사람들 또한 그의 존재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사람다움은 그 고유의 향으로 존재의 기운을 만들고,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면, 오리지널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뿜어내는 존재의 힘이다. 그 사람다움은 삶의 여정 속에서 내면과 외면에 누적된 무엇으로 발생한다.
그르누이는 이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의 향이 좋으면 그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의 향을 흉내 내어 만들려 했다. 그르누이는 반대로 접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그런 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런 향을 가지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점, 향수에 대한 주객전도 된 그루누이의 착각이 앞서 말한 이성을 유혹한다는 향수와 잘 팔리는 향수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그리고 그 향을 맡은 사람 모두에게 발생하는 바로 그 딜레마.
향수 소비자의 심리
향수를 사는 소비자의 심리는 그르누이의 순서 바뀐 발상과 닮았다. 소비자는 섹시한 어른으로 느껴지고 싶어서, 청순한 아가씨로 느껴지고 싶어서, 터프한 마초로 느껴지고 싶어서 향수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촉매제는 각종 프로모션과 광고다. 향은 형상이 없기에 아무리 첨단 CG를 사용해도 그 향을 보여줄 순 없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캐릭터와 이미지를 부여하기에 더 좋다. 아무것도 없기에,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에 그 향기에 형용사 하나를 갖다 붙인 뒤 그 형용사에 걸맞은 분위기와 이미지, 스타를 기용해 광고를 하면 된다.
여기에 패키지도 한몫 거든다. 모든 향수는 그 나름의 모양을 갖고 있다. 이미지도, 캐릭터도, 이름도 없었던 향이 옷까지 차려입은 것이다. 투명인간이 옷을 입는 것처럼. 이렇게 향수는 향에서 사물로, 사물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캐릭터로 발전한다. 소비자의 선택은 이 지점에서 이뤄진다.
일전에 썼듯이 딸 덕분에 얼마 전까지 매주말마다 백화점에 갔었다. 갈 때마다 점원이 판촉용으로 건네는 시향지를 받아 왔다. 책갈피로 쓰기엔 딱 좋은 재질과 크기였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이유로 받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종이를 받을 것이고, 그중 몇몇은 그 향에 반해 같은 향수를 살 것이다. TV 광고에 나오는 유명 향수 광고에 끌려 향수를 사는 사람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향수를 산다면 그 향은 자신의 고유한 “다움”을 만드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거 아닐까? 무수하게 판매된 향수로 특정한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걸까? 유명 향수, 잘 팔리는 향수를 쓴 다는 건, 어쩌면 기꺼이 무명의 존재가 되기로 자원하는 셈인 거 아닐까?
향수는 변신의 욕망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개성의 확립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향수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한다면 도드라진 변신은 실패한다. 나를 만드는 건 좌절된다. 오히려 개인의 고유성만 사라지고 대중 속의 나만 남게 된다. 결국 우린 고유의 향을 지키는 대신 새로운 향을 향한 도전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향수 회사와 그곳의 마케터가 바라마지 않는 것이지만.
향과 사람다움의 유사성
애초에 그르누이가 향수로 획득하려 했던 것은 “그 다움”이었다. 향수가 없는 자신이 온전한 주체로 대접받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르누이가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향의 가치는 한 사람의 고유한 그 다움과 맞물려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향수는 타인의 향을 기반으로 했다. 사람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향을 빌려야 했다. 세상의 모든 향을 맡아 구분할 수 있었던 그도 부재하는 자신의 향을 맡아 구별하며 만들 순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만든 향수는 그의 정체성을 만드는 향수가 아니라 다른 이와 같아지기 위한 향수였다. 더 나아가 최후로 만든 향수는 모두에게 추앙받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향수였다.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모든 이들에게 탐욕과 탐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향수를 그르누이는 기꺼이 뒤집어쓰고 향이 없던 존재로 돌아간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즉 죽음을 선택한다. 향수가 없는 존재, 그 다움이 없는 존재는 살아도 죽어도 존재감이 없기는 매한가지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며.
결말이 가까운 이 지점에서 내면의 향을 키우기 위해 마음을 곱게 쓰고 교양을 쌓으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향과 향수, 그리고 사람다움은 같은 성질을 갖고 있음을 말하려 할 뿐이다. 향은 내 것이지만 나를 벗어나 존재한다. 체취든 향수로 만든 향기든 타자에 다다라야 그 일을 한다.
향은 또, 내 것이지만 그 다다름의 거리를 알 수 없다. 향수를 많이 뿌리면 멀리 가겠지만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 수 없고 진한 향이 두려워 적게 뿌린다고 먼데까지 다다르지 못하는 건 아니다. 향은 또, 내 것이지만 그 좋음과 나쁨의 판단이 내게 있지 않다. 물론 나야 좋아서 쓰는 향수라 하더라도 타인의 후각엔 어떨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백 명의 무명인이 좋아하는 향이라도 단 한 명의 특별한 사람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향이 나는 물건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골라야 하는 이유다.
결국, 모두에게 사랑받는 향수가 세상에 있을 수 없듯, 사람 또한 그러하다. 자신의 사람다움을 모두에게 환영받길 바랄 필요 없다. 영화 속 사형대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는 신의 영역에 다다른 사람이다. 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완벽한 향수를 찾아서, 내게 결여된 무엇을 채워줄 향수를 찾아 헤맬 필요 없다.
애초에 향수는 악취를 묻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세상에 발휘하고 있는 향이 악취만 아니면 된다. 내 사람다움에서 악취만 나지 않는다면 굳이 향수를 쓸 필요는 없다. 나답게 살면 된다. 살다 보면 나만의 시그니쳐 향수는 완성된다.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에 담긴 이 비밀을 처음 읽었을 때 알았다면, 좀 다르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