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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y 06. 2024

미메시스-군터 게바우어, 크리스토프 불프

동해선에서 읽은 책 84


“미메시스적 행위 속에서 주체는 주어진 세계를 자신의 형식부여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산출한다. 그것은 주체 자신의 세계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체는 자신과 함께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그 세계를 공유한다. 미메시스적으로 산출된 세계들은 결코 유아(唯我) 론 적이지 않으며 공동의 자산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미메시스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즉 미메시스는 주어진 뭔가를 모방하는 일이면서 또한 그것이 주체에게 아직 확정된 형태를 띠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을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P 18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읽는 법

첫 번째 방법은 간단하다. 다 읽은 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끝까지 읽을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기대다. 다음 페이지부터는 좀 재미있어지겠지, 다음 챕터는 좀 달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그냥 무식한 내 탓이려니 하고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이 세 방법을 다 동원한 끝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우선 이 책 보다 더 끌리는 책이 쌓여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 안 읽으면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아서, 계속 끌리는 책만 읽으면 너무 책을 편식하는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 ‘아, 이것만 다 읽으면 재미있는 걸 읽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을 밖에.


두 번째 방법의 맥락에서 보면, 이 책은 중반부부터 열기가 느껴진다.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초반부에는 뭔가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책이 있다. 탐색전이 지루하게 펼쳐지는 1라운드나 축구의 전반전 10 분까지의 시간처럼 뭔가 차곡차곡 쌓아가긴 하지만 세기나 방향성이 미적지근한 책이 있다. 그게 저자의 탓인지, 번역자의 탓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어느 부분부터 ‘오, 이제 좀 글이 살아나가는데.’, ‘야, 이 생각을 말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야.’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책이 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이런 책의 가장 대표적인 예. 세 번째 방법은 소설이든, 인문서적이든 미지의 세계에 처음 들어가는 마음가짐이라 보면 되겠다.


미메시스라는 흔한 말

책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헤게모니, 패러다임 같은... 최근엔 읽은 책에는 의외로 착종과 미메시스가 자주 등장했다. 착종의 뜻을 찾아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반면 미메시스는, 뭐랄까 단순한 정의에서 복잡한 정의까지 다 들여다봤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면 남는 잔여 된 뭔가가 있는 느낌이랄까? 모방? 재현? 흉내? 따라 하기? 유명한 단어를 빌려오면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이 책은 이 단어의 역사와 의미, 단어가 적용되는 분야, 그리고 이 단어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수용했던 여러 학자들은 두루 소개하고 있다. 저자들의 에너지가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느껴지는 부분은 3장 <사회세계에서의 미메시스>부터다. 플라톤에서 데리다까지 이어지는 미메시스에 대한 생각과 구상, 인류학적인 맥락, 시간에 대한 공통된 감각 등을 다룬 1장에서도, 미학, 특히 미술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한 2장에서도 3장 같은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어쩌면 저자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3장 아니었을까?


모방, 체화, 재생산

얼마 전 들은 이야기다. 아내 친구 중에 이십몇 년 차 된 초등학교 교사가 있다. 아내가 아이 문제 때문에 상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아이가 그러면 대체로 부모도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잘 못한 줄 모르면 부모도 잘 못 인지 모른다고.


이 말은 솔직히 무서운 말이다. 교사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 그렇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생각해 보면 더 무섭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단락이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메시스는 단순히 미믹(mimic),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방을 통해 타자와 사회의 “것”을 주체 스스로 체화하고, 그것을 다시 재생산하며 변화시키는 것이 미메시스다. 즉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모두와 닮았으면서도 누구와도 닮지 않은 주체가 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그 점에 있는 거 아닐까?


같게, 또 다르게

모방과 부모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나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모든 걸 가르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자신이 살아온 대로 살게 하고 그렇게 고스란히 나의 삶의 형태를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또 그럴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딸은 네 살 때까지 전혀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나와 아내가 소위 표준어를 썼기 때문인데, 네 살 무렵, 조금 큰 어린이 집으로 옮긴 후부터 서서히 사투리를 쓰기 시작하더니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부터는 그냥 부산 소녀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 딸은 평생 사투리를 쓰게 될까? 솔직히 그건 모른다.


학습된 언어인 경우, 그러니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인 경우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처제는 이십 대에 접어들었을 때 이미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해서 그 나라 사람과 연애를 할 정도였는데, 그런 처제가 텍사스로 어학연수를 가서 그곳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거기서 살게 됐다. 그렇게 몇 년 후, 영어 관련 자격증 획득을 위해 잠시 한국에 나와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학원의 학생과 강사들이 처제에게 텍사스 사투리를 쓴다고 했었다. 아마 지금은 그 사투리가 더 심하지 않을까? 벌써 처조카가 고등학생이 됐으니 말이다.


태생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자부하며 평생을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누구도 모방하지 않고 누구와도 닮지 않은 존재로 살겠다고 선언하며 사는 것도 우습지만 이 반대의 경우도 우습다. 출신 지역, 출신 학교, 부모의 배경, 살아온 사회적/지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지금의 나를 완성된 나로 여기고,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사는 것도 그야말로 난센스라는 말이다.


어쩌면 삶은 끝없는 변주일지 모른다. 마치 하나의 재즈곡에 수많은 연주가 있듯이 삶 또한 그렇게 연주할 때마다 다르게 연주하는 바로 “그 곡”일지 모른다. 당신이지만 당신이 아닌, 당신인 듯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그렇게 살짝살짝 어긋나면서 조금씩 새로워지는 그런 거. 그게 삶 아닐까? 어쩌다 미메시스를 얘기하다 좀 멀리 왔다. 여하간, 우린 어떤 거대한 미메시스의 흐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해방을 주장하며 뛰쳐나갈 필요도 없다. 보다시피 우린 이렇게 조금씩 다른 역사를 써가고 있지 않나?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인용하고 참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이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놀이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족 -

부산 소녀인 딸내미와 텍사스 아줌마 처제는 아내와 처남, 장모님과 함께 진도로 여행을 갔다. 텍사스 아줌마는 지난달 말에 친구와 들어와 서울 관광을 하고 며칠 전 부산에 내려와 우리 집에 머무는 중이다. 이번에 올 때는 특이하게도 좀 과한 선물을 사 왔다. 노스페이스 재킷 두 벌... 그전에는 텍사스 지역 기념 티셔츠나 모자, 간단한 운동 셔츠 정도였는데.... 흠... 나이가 드니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가?


텍사스 아줌마와 얘기를 하다,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꺼냈다. 망해가는 캘리포니아와 그곳 사람들이 향하는 텍사스와 플로리다에 대해... 처제 말로는... 정말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어마무시하게 몰려온다고 한다.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선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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