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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01. 2024

101번 버스에 올라탄 기타리스트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50

한 달에 두 번가량, 딸은 문현초등학교에 인문영재수업을 받으러 간다. 보통은 데려다주는 건 아내가, 데려 오는 건 함께 가는 친구 아버지가 태워다 주는데, 오늘은 그 친구가 배드민턴 시합을 나가서, 내가 버스를 타고 데리러 갔다.


아내가 발레를 하러 가고, 난 열 시부터 대략 50분 정도 간단한 근육 운동을 했다. 대충 씻고,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낡은 지갑과 오래된 레이벤 선글라스-딸이 이 선글라스를 좋아해서 요즘엔 이것만 쓴다-를 끼고 어슬렁 걸어서, 집 근처 대연사거리에서 101번 버스를 탔다. 잠시 후....

남구청 뒤, 세연고등학교 앞에서 덩치 좋은 청년이 탄다. 미숫가루 색 반팔 티셔츠, 검은색의 헐렁한 카고 팬츠, 머리는 마치 스타워즈 츄바카를 연상시키는 산발.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입은 티에 새겨진 그림, 그리고 등에 맨 기타였다. 반팔 티셔츠에는 기타 브랜드 팬더의 로고와 기타가 그려져 있었고, 그의 기타 가방은 깁슨이었다. 기타의 부피나 길이로 봐선 일렉 기타 같았다. 일렉베이스를 담기엔 한참 짧았으니까.


토요일 오전 열한 시 이십 분. 그는 기타를 등에 지고 버스에 올랐다. 이 버스는 남구 감만동과 태종대 사이를 오가는 버스. 그는 태종대 방향 버스에 올랐다. 어디에서 내릴까? 문현로터리에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서면으로 나갈까? 좀만 더 가면 부산역인데... 그곳에서 어디 다른 도시로 갈까? 아니면 남포동 근처에서 내려서 적당한 연습실로 들어갈까? 아니면 요즘 가장 핫한 영도로 스며들까?


내 앞에 앉은 청년의 두툼한 어깨를 봤다. 비비 킹 같이 떡대 좋은 친구는 어떤 음악을 주로 하려나... 오늘의 음악을 책임지고 있는 이 영상 속 주인공들 의 음악 같은 블루스나 재즈도 어울릴 것 같고, 힘이 좋아 보이니 메탈도 어울려 보이고,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도 연상시키니 레드 제플린 스타일의 하드록도 어울릴 듯. 여하간 이 날씨 좋은 6월의 첫날이자 첫 토요일, 자기가 좋아하는 뭔가를 하기 위해 그렇게 아무렇게나 입고 버스에 올라탄 청년이 그럴싸해 보였다. 그래.. 뭐라도 해라... 집에 처박혀 있는 것 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


집에 통기타가 있지만 안 친지 꽤 됐다. 일렉 기타를 안 친지는 한 이십 년... 일렉 베이스도 그 정도.... 건반은 말할 것도 없다. 시간이, 세월이 참 빠르다.


아내는 <선재 업고 튀어>를 또 보고 있고 딸은 자기 방에서 쉬고 있다. 난 휴대폰이 충전될 때까지... 이런저런 음악을 듣다가 이 친구들 음악을 들으며 오전의 그 청년이 생각나 몇 자 적었다.


충전이 다 됐다. 이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에 있는 캠핑 의자에 앉아 레몽 아롱의 얇은 책을 읽을까 한다. 아니면 바디우의 <들뢰즈-존재의 함성>이나...


여하간... 그런 청년들의 음악에, 그들이 하는 뭔가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뭐, 그런 역할이라도 잘했으면...


https://www.youtube.com/watch?v=KQWQEbvth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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