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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17. 2024

그 남자의 마지막 퍼팅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52

우연히 잡힌 US 오픈의 결정적 장면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딸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씻으러 들어갔다. 더웠는지 문을 열고 자는 딸의 방을 살며시 들여다봤다. 딸은 창 문쪽으로 머리를 두고 곱게 잠들어 있었다. 온수를 한 잔 담아 와, 테이블에 앉아 채널을 돌리는데 우연히 US오픈 파이널 라운드를 생중계해주는 채널이 잡혔다. 골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채널을 돌리려 하는데, 카메라가 잡고 있는 선수의 상황이 기막혔다. 해설자와 캐스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 상황의 긴박함 및 중요성과 부조화를 이루며 심야 라디오 방송 DJ의 멘트처럼 흘러나왔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나온 순위표를 봤다. 그나마 낯익은 이름인 매킬로이는 라운드를 끝냈다. 2위인가, 3위였다. 지금 카메라에 잡힌 선수는 매킬로이와 우승을 다투는 선수였다. 이번 에서 파(딱 규정 타수만큼 치고 나오는 것)를 하면 우승, 보기(규정 타수보다 하나 더 치는 것)를 하면 우승은 물 건너가는 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선수의 샷은 난관에 빠졌다.      


안 그래도 느린 템포의 골프 중계인데, 파이널 라운드의 선두를 다투는 이 선수의 이 기막힌 상황을 담기 위해 카메라는 한층 인내심을 갖고 고정되어 있었다. 우승은 어려워 보였다. 공은 페어웨이를 벗어난 러프에 있었다. 얼핏 보면 목련이나 모과나무로 보이는 나무 아래 공이 놓여 있었고, 나무의 뒤에는 갤러리들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좌석의 철골 구조를 가리기 위한 진회색 천막이 스크린처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공을 클로즈업했다. 공 앞에는 지면 위로 돌출 된 나무뿌리가 막고 있었고, 공 뒤에는 맥도널드의 프렌치 후라이드 크기만 한 부러진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홀까지는 120야드라는 멘트가 나왔다. 파까지는 세 타의 여유가 있었다. 일단 페어웨이에 올린 후, 그린을 공략하고 그 뒤에 퍼팅을 제대로 하면 파로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우승이다.      


초조한, 그러나 서둘지 않는

이 선수는 캐디와 의견을 나누고 몇 번이나 적절한 각도를 잡았다. 연습 백스윙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아이언을 들고 있었던가? 모르겠다. 여하간 긴 궁리와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이 이어졌다. 갤러리도 카메라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봤다. 드디어 스윙. 공은 벙커에 빠졌다. 그러나 선수는 당황해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 함께 조를 이룬 선수의 플레이가 이어졌다. 비교적 쉬운 러프에서 공을 쳐서 그린에 올렸다. 이어서 그 선수의 샷 차례였다. 카메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갤러리도 숨을 죽였다. 벙커에서 나와 그린으로 올라간 선수는 걸음으로 홀과 공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잘만 올리면 파로 마무리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캐스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매킬로이의 샷이 홀을 지나치는 바람에 퍼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 선수에겐 과제가 하나 더 주어졌다. 벙커에서 나온 공은 홀을 지나쳐서는 안 됐다. 가볍게 쳐서 홀 앞에 떨궈야 했다. 마치 아내에게 조절이 불가능한 장작불에 고기를 굽되 태워서는 안 된다는 지령을 받은 캠핑 초보 남편의 처지와 비슷해 보였다.     

 

툭 쳤다. 공은 가볍게 올라 잠시 비행한 후 그린에 툭 떨어졌다. 잠시 굴러가더니 홀에서 약 1미터 정도밖에 멈췄다. 갤러리의 환호성이 터졌다. US오픈이다. 그렇다면 갤러리의 대부분은 미국 사람들일 테고, 그들이 이렇게 환호성을 질렀다면 선수 또한 미국인이라는 말이다. 이름을 봐서는 프랑스나 네덜란드 선수인 줄 알았건만 아닌 모양이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퍼팅에 성공하면 파로 마무리 되고 우승을 한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우승 경력이 나올 순간이다. 꽤 오랫동안 PGA에서 활동했다. 메이저 대회에서도, 그냥 대회에서도 우승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다 몇 년 전이다. 그동안 나름 부침을 겪었던 모양이다. 선수 이름은 브라이슨 디셈보.     


퍼팅만 남았다. 이렇게 짧은 퍼팅을 어이없게 실패해서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우승의 목전에서 쓴 맛을 봤을까? 난 러프에서의 샷보다, 벙커샷보다 이게 더 어려워 보였다. 마치 축구의 승부차기에서의 마지막 키커, 0.5초를 남겨 두고 얻은 역전승이 가능한 마지막 자유투를 앞둔 선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그는 신중하게 그린을 읽었다. 몇 번의 연습 후, 공을 마커 앞에 놓은 뒤 마커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후 콜로세움 경기장의 관중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갤러리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런 동작이 없었어도 갤러리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맥주도 입에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자국에서 열리는, 자국의 이름을 건 메이저 대회에, 자국 선수의 우승을 확정 짓는 마지막 퍼팅 아닌가? 씹던 땅콩도 통째로 삼킬 판이다.     


퍼팅을 했다. 성공. 그는 환호했고 캐디와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멘트가 흘렀고 그의 우승을 알리는 자막도 떴다. 이후, 그는 갑자기 진정을 한 후 갤러리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다시 보냈다. 같은 조의 선수의 마지막 퍼팅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야, 이 양반 우승할만하네.  


평정심의 무서움

무서웠다. 러프와 벙커를 신중하게 넘어온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퍼팅으로 우승을 확정 지었다. 남에 퍼팅이 실패해서 대기실에서 그 장면을 보며 우승의 기쁨을 누린 것이 아니다. 넣어야 할 퍼팅에 성공한, 바로 그 그린 위에서,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우승을 확정 지었다. 그 순간, 그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을 것이다. 당연히 환호성도 질렀다. 그런데 바로 잠시 후, 짧은 순간 뒤, 무서울 만큼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고 관중들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런 극적인 순간에 아버지와 껴안고, 캐디와 껴안고 샴페인 세례를 받으면서 다음 퍼팅을 해야 될 선수를 곤란하게 하는 장면을 몇 번 봤기에 이 남자의 매너가 무섭게 느껴졌다.      


인생을 살다 보면 찾아오는 고난은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는 뻔한 교훈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이 선수의 마지막 평정심에 대해 말하고 싶다. 물론 시합이 끝난 후 제법 오랫동안 우승의 감격을 누렸을 것이다. 벅찬 마음으로 인터뷰를 했을 테고 아내가 있다면 꼭 끌어안기도 했을 것이다. 며칠 동안은 여기저기 파티에 불리어 다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며칠이 지나고 나면 아마 다시 골프채를 잡을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인생을 지나가는 점일 뿐이다. 이 선수는 그걸 알고 있다. 이렇게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사람은. 그의 이 우승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장면과 함께 이뤄진 것인지 지금은 모를 것이다. 그도 당연히 모를 것이고 우리 모두가 이 장면의 가치를 지금은 다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우승의 서사는 US 오픈의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회자될지도. 러프와 벙커를 연이어 통과하고 우승한 한 남자의 서사가.     


살다 보면 안 풀릴 때가 있다. 인생 자체가 대박 하고는 연이 없는 사람이고 그래프로 삶의 기복을 그려보라면 정상적으로 뛰는 맥박의 높낮이 정도로, 그 희비의 고저가 일률적인 사람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안 풀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이렇게 살까 저렇게 살까 궁리를 했다. 누굴 만나서 어떤 부탁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돌아보니 최소한 길면 십 년, 짧으면 오, 육 년 단위로 이런 시기가 왔던 것 같다. 이런 시기,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시도했던 것들 대부분이 실패했다. 살아보겠다고, 헤쳐나가겠다고, 앞서 나가겠다고 고난 속에서 했던 선택들은 대체로 일회성이었고 미봉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풀릴 때도 그게 영원하진 않았다. 연애도 일도 좋은 시절 잘 나가는 시절은 한 때였다. 자랑할 필요도, 도취될 필요도 없는 찰나의 섬광이었건만, 그 빛 속에 있을 때는 어둠이 보이질 않았다. 다들 그러지 않나?      


최근, 딱히 어려운 것도, 인생의 위기도 없는데 불쑥 좀 다르게 살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여기저기 기웃대고, 이것저것 들춰 봤다. 지금은 다시 고개를 빼고, 다시 덮고 있다. 당장 내일, 감독과 함께 포항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당면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이 업계의 현역으로 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려 한다. 이 나이에, 아직도 멋지게 접영을 하잖아. 그럼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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