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얘기했듯이, 고급반의 강사는 대체로 말이 없다. 가타부타, 이래라저래라 지적하지 않는다. 가끔 정말 나쁜 버릇이 있는 사람만, 그것도 슬쩍 다가가서 몇 마디 해줄 뿐이다. 할 만큼 한 사람들이라 좋은 버릇이든, 나쁜 버릇이든 몸에 박혀있어서 고칠 수 있을 거라 크게 기대를 안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해주는 것이 강사의 의무이자 책임이기에, 심지어 권리이기도 하기에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그도 알고 나도 아는 것처럼 강사의 “슬쩍 코칭”을 들은 사람이 영법을 수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반복해 말하지만, 최소한 몇 년, 길게는 이십 년 이상 수영을 한 사람이 자신의 굳어진 폼에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쁜 폼 때문에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니 수영 실력이, 당연히 정체가 된다. 나아지지 않는다. 개선되지도 않는다. 분명 고쳐야 될 점이 있고, 바꿔야 될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다. 강사가 넌지시 말해줄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야말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이상한 폼들
비교적 앞 번이다 보니 먼저 들어와 뒤에 오는 회원들의 폼을 볼 기회가 많다. 마침 많이들, 그러니까 열 명 이상 오는 날이면 다 들어오는데 까지 십 여 초 가량의 여유가 생긴다. 보다 보면 가지각색이다. 자유형은 그나마 낫다. 배영부터는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앞을 보지 않고 가는 영법의 특성상 교정이 가장 어려운 영법이다. 지그재그로 오는 사람도 있고 버퍼링을 걸린 듯 팔을 주춤 거리며 돌리는 사람도 있다. 정신없이 팔을 돌리는 통에 영락없이 허우적대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평영과 접영으로 넘어가면 같은 폼을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나마 내 앞에 가는 주자들, 그러니까 1번부터 4,5번까지는 일정한 높이와 리듬을 유지하며 간다. 그러나 내가 들어와서 뒤돌아보면 겨우 얼굴만 나올 정도로 하는 사람도 있고 물 안팎으로 들락날락 거리는 빈도가 너무 잦아 이게 수영인지 살기 위해 고개를 수시로 내미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인 사람도 있다.
접영도 마찬가지다. 접영은 또 평영과 달라서 최대한 물에 붙어 나와서 부드럽게 다시 들어가는 것이 관건인데 상체 전체가, 마치 잠수함에 발사된 탄도 미사일처럼 훅 하고 튀어나왔다가 첨벙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힘 좋고 덩치 좋은 남자 회원들이다. 반면에 여자 회원들은 마치 사마귀처럼 팔을 구부린 채 꺼내는 사람들이 많다. 근력이 부족하다 보니 물 밖으로 팔과 몸을 꺼내는 게 쉽지 않다 보니 리듬을 살리는 건 고사하고 끝까지 오는 것도 힘들다.
변화를 위한 디테일
이런 회원들은 수영 체력이 완성됐기에 약간의 수정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물을 제대로 잡거나 상체가 나오는 타이밍을 좀 더 기다리거나 킥의 각도나 리듬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다른 수영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손의 각도와 킥을 차는 발의 각도만 살짝 바꿔도 훨씬 효율적인 수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예전, 선수 출신 강사는 우리에게 이런 디테일한 것들을 아주 집요할 정도로 가르쳤다. 이런 것들이 몸에 배일 수 있도록 기본적인 드릴을 반복해 연습시켰다. 특히 손의 물의 감각을 높여주는 스컬링(sculling)은 정말 지겹도록 반복했다. 킥을 찰 때의 발의 각도를 섬세하게 교정해 줬고 다리의 움직임과 리듬을 만들어줬다. 덕분에 지금도 수영장에 오면 강습에 들어가기 전, 2,3분 정도 스컬링을 하면서 물에 대한 손의 감각을 깨우고, 여러 가지 킥으로 하체의 리듬, 백 킥, 그리고 발의 각도를 점검한다.
앞선 글에서 얘기했듯이 자유형을 할 때, 물을 잡는 순간 새끼손가락을 벌리면 견갑골을 포함한 등근육이 활성화되어서 더 많은 근육을 쓸 수 있다. 여기에 스트로크가 시작되기 직전, 엄지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세워준 상태에서 물을 당기면 물을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의 근육을 써서 물을 당길 수 있다. 아주 사소한 동작이지만 스트로크의 효율면에선 큰 차이를 만들고, 운동의 효과는 더 좋아진다. 당연히 상체, 특히 광배와 활배근 등에 더 많은 운동이 된다.
변화의 이쪽과 저쪽
우린 변화를 A에서 B로의 전환으로만 생각한다. 그야말로 전환기적 사건이 있어야 변화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터널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오듯이. 그러나 인생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변화는 점증적이고 점층적이다. 뭔가를 하는 동안엔 인지되지 못하는 변화가 어느 순간 이뤄져 있다. 결국 우린 전환기적 사건을 기다리고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 “동안”에 뭘 해야만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새끼손가락을 살짝 벌리는 것과 같은 아주 작은 것들부터.
결국, 그 작은 것들의 중요함을 간과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면 나는 반복된다. 어느 작가가 SNS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출판사와 서점 - 최근, 대전의 향토서점이라 할 수 있는 계룡문고도 문을 닫았다. - 은 줄줄이 문을 닫고 현재 운영 중인 출판사들의 99퍼센트는 일 년에 한 권도 출간을 하지 않는데, 글을 쓴다는 사람과 책을 읽는다는 사람은 많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SNS를 들어가 보면, 그러니까 글쓰기와 독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SNS를 들여다보면 종종 성장과 자기 계발이라는 키워드가 전면을 장식하곤 한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성장과 계발은 더디게 온다. 글을 써서, 책을 읽어서 발생하는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더디게 온다. 그건 일종의 결을 만드는 시간이다.
다른 결을 만드는 것들
털이 있는 모든 동물엔 그 결이 있다. 살아내기 위해 필요했던 털을 지니고 살아낸 동물만이 그 결을 완성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같은 종이라도 그 결은 다를 수 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늑대와 야생의 늑대는 멀리서 보면 같은 털의 같은 결을 가진 듯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른 결을 갖고 있다. 야생의 존재만이 털 안에 상처와 계절의 변화와 사냥의 흔적을 지니고 있을 테니.
결국, 지금의 나라는 존재, 나의 결을 만든 건 지금까지 살아온 나다. 당연하게도 미래의 나라는 존재를 만드는 것 또한 살아갈 나다. 그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내가 선택한 작은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하고 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법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최대한 유사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로 부족하면 두 개로, 두 개가 부족하면 세 개로, 연이어 사물을 덧대어 가며 의미의 성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마치 클리포드 기어츠가 <문화의 해석>에 실린 첫 번째 논문 『중층기술 : 해석적 문화이론을 향하여』에서 말한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 소위 말하는 “두텁게 쓰기”처럼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말한 소확행도, 그리고 그의 수많은 소설 속에서 다림질과 요리와 운동과 음악과 섹스와 의외로 근면 성실한 일의 태도를 꼼꼼히 기술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종종 우물이나 어떤 문을 통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볍게 넘나들지만 현실에서 나라는 존재의 변화는 그렇게 간단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세월이 지난 후, 그 변화를 실감하기 위해선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의 변화를 통해 그 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해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독서가, 우리의 글쓰기가, 우리의 일상과 그리고 수영이 언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 모름은 막연함을 부른다. 이제 막 배영을 배우고 있는 초급반 회원의 마음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그런 감정을 닮은 막연함을.
이제 막 수영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옆 레인에서 접영으로 날아가는 고급반 회원들의 모습은 너무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수영을 시작한 사람은 7,80퍼센트가 접영을 배우다가 그만둔다. 아무리 길어야 1년 안에 그만둔다는 얘기다. 그렇게 접영을 하고 싶다면 될 때까지 수영장에 오는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접영을 돌아보면서 조금씩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수가 있는가? 내가 아는 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