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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21. 2024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 우자와 히로후미

동해선에서 읽은 책 104

뜬금없는 경제학 책

우선 이 책을 왜, 그것도 사서 읽게 됐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늘 그렇듯, 동네에 있는 중고서점에 새로 입고된 책들의 목록을 살필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책이지만 제목이 깔끔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어떻게 불평등을 초래하는가?>, <자동차에 가려진 경제학의 그늘>과 같은 종류의 제목이 아니어서 맘에 들었다. 이 깔끔한 제목의 책을 도대체 누가, 언제, 왜 썼는가. 상세정보에 들어가 봤다. 저자 이력이 화려하다. 게다가 동아시아 인문 100권에 선정된 현대의 고전이라니.......     


다른 이유는, 자동차를 좋아하면서도 자동차 운전자 산업 종사자와 일부 운전자의 자동차 중심의 사고방식은 혐오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한 도시가 자동차 이동 중심으로 교통망과 도로망이 형성되면, 그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는 글 말미에 설명하겠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10대, 20대를 미군 부대 앞, 속칭 기지촌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 동네에서 살다 보니 다종다양한 자동차를 보게 됐다. 주로 미국산 대형 자동차들. 픽업트럭, 머슬 스포츠카, 험비, 블레이저 같은 사륜구동 SUV 등등.      


이런 이유로 자동차라는 사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존재감은 좋아한다. 게다가 당시, 미국의 자동차 경주인, 시판되는 자동차의 모델을 개조해서 하는 나스카 경주나 포뮬러 시리즈의 모델로 시합을 하는 인디애나 500 같은 경기를 AFKN을 통해 열심히 봤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여하간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자동차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인해,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1970년대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자 그럼, 본론으로...     


서류에 없는 가치들

지난 20여 년 간, 직업상 정부 부처 및 지자체의 각종 서류를 접했다. 각종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 보고서, 경제효과평가서, 특정행사의 결과 및 효과 보고서 등이 주를 이룬다. 이 서류들이 주로 다루는 내용 중 하나는 SOC(사회적 간접자본) 인프라의 설치에 관한 필요성과 그 효과, 다른 하나는 관광 개발 및 관련 시설의 설치와 기대효과에 관한 내용들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사회과학대 소속의 학과에서 오래 공부를 한 덕에 통계를 좀 볼 줄 알아 각종 보고서들에 담긴 숫자의 의미를, 최소한 의심해 볼 수는 있다. 이런 의심의 시선으로 숫자를 들여다보면 숫자들의 토대, 그것의 부실함이 보인다. 그 토대의 부실함엔, 또는 부실함의 토대엔 과거의 현재로의 직접적 적용,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 현재 상황이 불변하거나 급변할 것이라는 상반된 - 담당자와 연구자, 혹은 지자체장의 입맛에 맞는 - 기대 등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보고서들에 빠져 있거나, 있어도 축소되거나, 심지어 외면받는 것은 이 책의 저자 우자와 히로우미가 사회적 공통자본이라 부르는 것의 가역적이면서, 심지어 불가역적 “손실”, 즉 사회적 비용이다. 예를 들어 강에 다리를 놓으려 하면 기존 다리들이 감당하고 있는 교통량, 인근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 신도시, 이로 인한 인구 증가, 이로 인한 자동차 대수의 증가와 교통량 증가 등이 상세히 보고된다. 여기에 약간 거리가 있더라도 근처에 새로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산업 물동량의 증가분까지 추가된다. 물론 이 수치들은 완전 분양, 완전 입주, 완전 개발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신도시나 아파트 단지에 모든 세대가 분양이 되고 산업단지도 그렇게 됐을 때를 가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산업단지의 경우엔 입주된 기업들이 모두 잘 돌아갈 때를 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엔 다리가 들어섬으로 인해 바뀔 풍경의 변화와 그 가치에 대한 평가는 없다. 또 당연하게도 강 속의 수중 생물과 철마다 찾아오는 철새와 그 철새를 탐사하는 탐조객의 감소, 자연 탐사를 오는 학생들의 감소, 지역 자연 자원의 감소 등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사회적 손실에 대한 평가가 들어설 자리는 없거나 비좁거나 후순위로 밀린다. 환경영향평가서 같은 것들 말이다.


플러스를 향한 의심

최근의 일 때문에 여러 지자체의 유사한 보고서들을 보면, 겹치는 사안들이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케이블카, 대관람차, 스카이 워크, 트램(노면 전차)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앞의 세 개는 그야말로 광역/기초 단체장 가리지 않고 시도하려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케이블카 중 흑자인 건 그야말로 손에 꼽힐 정도고 대관람차는 경관의 조화와 위법 사항 때문에 해체 위기에 직면한 것도 몇 개 있다. 스카이 워크도 마찬가지다. 경치 좋은 곳에 설치해야 그 가치가 높아지는 만큼 기존의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는 들어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꾸준히 추진되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단체장의 임기 중 치적 때문이다. 지역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라는 구호는 그야말로 구호일 뿐이다.      


이 치적을 위한 보고서엔 플러스만 존재한다. 긍정적인 플러스, 미래지향적인 플러스, 사람도, 돈도 다 플러스다. 그것만 되면 지역에 돈이 들어오고,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온다. 그"치적"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이 현상은 계속된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뉴스를 보고 세상 돌아가는 걸 대강이라도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이 플러스들이 절대로 플러스가 아님을 알고 플러스에 밀려 미처 기록되지 못한 마이너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연하게도, 이 보고서를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마이너스의 존재를 알고 있다. 공무원, 연구서와 보고서를 작성한 지역연구원, 지역대학의 교수(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연구비를 받은), 그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들도 다 알고 있다.      


이익 뒤에 가려진 외부불경제

이들이 플러스를 과대평가하는 반면 마이너스는 과소평가하고, 심지어 외면하는 이유는 뭘까? 당연하게도 각자에게 떨어지는 이익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외부불경제”에 대한 둔감한 때문이다. 외부불경제는 “어떤 경제 주체가 다른 경제 구성원들에게 뜻하지 않은 손실을 입히고도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외부불경제의 폭은 넓다. 앞서 말한 가역적이면서 가시적인 것도 있다. 예를 들어 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부득이하게 차도를 넓히기 위해 왕복 차선을 한 차선씩 넓혔다고 하자. 또는 최근처럼 차량의 크기가 커져서 차도 자체의 폭을 넓혔다고 하자. 그 공간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당연히 인도의 폭을 줄여야 가능하다. 인도를 줄이면 당연히 인도를 사용하는 보행자는 불편해진다. 자동차를 사용할 수 없는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동권을 침해한다. 차량이 더 늘어나면 대기 오염과 소음 공해도 증가한다. 운전자들은 넓어진 차도로 즐겁게 운전하는 동안 그 운전자들로 인해 다른 구성원은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책은 1974년에 나왔다. 경제학도인 저자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여러 대학의 구애를 뿌리치고 조국의 대학에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여 돌아온 뒤 이전과 달라진 자신이 사랑했던 고향, 도쿄의 풍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 연구를 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소위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완벽한 시장주의 경제학을, 자율적인 선택과 경쟁과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한 경제 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그 경제학 말이다.


그러나 그가 공부한 것으로는 그가 돌아온 고국에서 만난 도쿄의 현실과 그 현실이 만들어낸 부조리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 책 후반부에서 이 고전주의 경제학의 문제점과 한계를 조목조목 짚어낸 뒤, 사회적 비용에 대해 일본 사회가 고민해야 될 시점이라고 역설한다.


자동차 중심 도시의 한계

면허증이 있으나 운전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으며 단 한 번도 내 명의로 된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통 인프라 구축에 회의 어린 시선을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최근엔 대중교통, 특히 시내를 연결하는 철도가 없는 도시는 활력을 유지하는 것도, 잃은 뒤 회복하는 것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활력은 경제적 활력과 유관할 수도, 무관할 수도 있는 활력이다.      


예를 들어 울산은 시내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다. 그래서인지, 시내에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관광객을 보기가 쉽지 않다. 법적으로 어느 정도 크기 이상의 캐리어는 시내버스에 휴대하고 탈 수 없기 때문에 자동차가 없거나 운전을 못하는 관광객, 특히 젊은 관광객들은 울산을 찾는 것이 쉽지 않거나, 찾게 되면 당연히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부산은 흔히 볼 수 있다.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이 찾는 부산의 유명 국밥집 앞에 사는 필자는 어렵지 않게 캐리어에 걸터앉아 줄을 서 있는 관광객을 볼 수 있다. 광안리에 있는 처남에게 놀러 가면 광안리 골목 곳곳에서 캐리어 굴러가는 굵직한 바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부산의 도시철도가 부산의 유명 관광지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자 광경이다.      


조만간, 부산과 울산 사이만 이어졌던 동해선이 강릉까지 이어진다. 아마 12월부터는 부산에서 강릉까지, 짧은 배차 간격이 있는 철도, 또는 도시 철도를 이용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뉴스를 보면, 이 사이에 있는 도시들이 그 혜택을 볼 수 있으리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항, 울진, 영덕, 삼척, 주문진, 정동진, 강릉....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역설적이게도 철도와 연계된 대중교통이 없으면 그 혜택을 누리는 건 어려울 것이다. 자동차를 이용해서 그 지역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굳이 철도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고, 철도를 이용하는 신규 방문객은 그 철도와 연계된 대중교통이 있어야 그 도시에서의 내부 이동이 가능할 것이기에.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자동차가 없는 이십 대 초반의 관광객 유치와 그들의 장기 체류가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한 달 살이 같은 건, 그야말로 딱 한 달 살이에 그치거나.   


일본의 경우

1970년대, 이 책이 나왔을 때, 일본은 열심히 고속도로를 만들고 이곳저곳 관광지를 연결하고 있을 때였다. 도심에선 노면 전차를 없애고 자동차 중심의 도로로 재편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 후, 일본은 서서히 그 문화를 바꿔서 주차 공간 없이는 자동차를 사기 힘들고, 고속도로 통행료는 무지하게 비싼 나라가 됐다. 알다시피 지하철의 노선은 계속 확충됐고 노면전차 노선의 복원과 모노레일 노선의 신설이 이어졌다.


일본 여행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오늘날의 일본은 이동에 있어서만큼은, 특히 도시 내부에서의 이동에서만큼은 자동차 중심의 나라라고 보기는 힘들다. 현재, 고령화와 저출생의 현실을 받아 들고 있는 일본의 도시 경쟁력의 평가 지표 중 하나는 결국, 대중교통이 얼마나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지 여부다. 노약자와 관광객이 얼마나 편하고 쉽게 이동할 수 있느냐가 도시의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하나의 잣대가 된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운전하기 어렵다는 도시 부산에 살면서, 자동차 산업의 메카라 불리는 울산을 왕래하면 일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도시는 현재 대중교통 확충에 사활을 걸고 있다. 부산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부산의 서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도시철도 연장 공사를 지속하고 있고, 울산은 노약자와 관광객의 수월한 이동을 위해 트램 설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는 예비타당성을 통과해서 거의 삽을 뜨기 직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 두 도시는 왜 대중교통, 그것도 도시철도 확충에 애를 쓰는 걸까? 내부적으로 청년이 없으면 외부에서 오는 청년이라도 오래 머물러야 도시가 활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많은 지방 도시들이 다른 도시들과의 연결을 위해 산을 허물고 강을 건너는 고속도로 확충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 연결이 지방도시를 젊게도, 활력 있게도 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입증됐다고 봐야 한다. 그 도로들은 그저, 그야말로 자가용 관광객의 계절 이동을 위한 통로 역할에 불가했다.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의 작은 도시들은 결국 아직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도시 내부를 이동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렇게 이동을 갈구할 만큼 도시 곳곳에 매력적인 곳이 있느냐가 그 존폐의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이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이 책은 분명 경제학 책이다. 심지어 1970년대 초반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양적 성장을 위해 내달리는 동안 희생 된 누군가는 있지 않은지, 사람의 편리를 위해 말없이 희생되고 외면당한 것이 있지는 않은지, 그 희생당한 것 중엔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것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가 훗날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부유해져도 그 경제력과 돈만으로는 절대로 살수도 복원할 수도 없기에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된 것이 있지는 않은지 자문하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자기 지역의 산과 강과 바다의 경치가 좋은 곳에 케이블카와 스카이 워크와 대관람차를 유치하려는 단체장과 지역 주민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서문은 현재 동아시아출판인회의 고문이자 전 이와나미쇼텐의 사장, 그리고 출판 당시, 저자인 우자와 히로후미의 편집자였던 오쓰카 노부카즈가 썼다. 그가 담담히 옮긴 저자와의 만남과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저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젊은 편집자의 저자를 향한 존경과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책은 두껍지 않은, 제법 저렴한 문고본이었던 듯, 하다. 이와나미쇼텐의 이와나미신서의 시리즈 중 하나로 나왔기 때문. 검색하여, 이 이와나미신서의 목록을 보니 그 당시 일본 지식인, 학계, 그리고 독자층의 열정과 저변의 깊이와 강도를 짐작된다. 일본의 독서 문화의 뿌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꽤 깊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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