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이야기를 다 알 것이다. "우리가 신에 다다르자.", 이 목적 하나로 근방의 인류가 뭉쳐 탑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신은 그 모습을 보고 단 하나의 조치를 취했다. 언어를 흩어버린 것이다. 저자가 지적했듯, 이 이야기엔 두 가지 은유가 담겨 있다. 하나는 언어의 힘, 다른 하나는 고층의 탑으로 대표되는 기술의 힘. 두 힘 모두, 인간의 이성을 대표하는 것이고, 인간이 만든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자 그 세상을 만든 힘이다. 그러나 중세에는 이 힘에 대한 의심이 존재했고 그 의심의 근원에는 “원죄”가 있었다.
원죄는, 기독교인들은 잘 알겠지만, 에덴동산의 그 사건을 말한다. 그 사건 이후, 인간은 그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문제는, 인간이 만든 그 세계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세계는 원죄로 인해 복원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공백이 된 것이다. 결국, 그 이후 인간이 만든 세계는 그 완전한 세계의 모사품에 불과하다. 가장 완벽한 건축물도, 그림도, 언어도, 심지어 신에 대한 묘사와 신을 위해 지은 성전을 포함하여. 이 시기 화가들에겐 모사물의 모사를, 이미지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죄라는 인식이 있었다. “인간 세상에서 확실성은 하찮은 오류의 산물이고, 이성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조화로움은 언제 몰락할지 모르는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기술은 성경의 일화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에 국한 됐다.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아나고지아, 신과 진리의 우연한 출현
결국, 신의 진리는 인간의 의지와 기술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신비주의적 영감에 의해 나타난다. 아케이로포이에토스는 천이나 캔버스, 벽 등에 예수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아나고지아는 성경의 해석 방법 중 “깊은 명상을 통해 성서의 문장을 해석하는 과정이다.”
세상이 만든 법과 기술과 언어에 길들여진 인간의 눈으론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엔 신이 없고, 완벽하다고 하는 것에도 없다. “신은 꽃과 보석이 아닌 역겨운 벌레의 이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왕의 영광스러운 걸음걸이가 아닌 거지의 절름거리는 형상 속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렇듯 아나고지아란 인간적인 이성과 규범의 한계를 넘어선 장소로 주체를 이끄는 해석에 의존하는 태도다.”
부활한 예수가 그를 만지려 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의 부활은, 저자의 말을 빌리면, “진리 사건”이다. 그야말로 신의 현현(顯現)이다. 그 사건, 진리 사건은 인간의 접촉을 거부한다. 접촉은 인간의 경험이다. 경험은 다시 인간의 말을 통해 전해진다. 당대의 사회의 규범과 언어 속에서 수용된다. 수용 가능하게 번역되어서. 그걸 알고 있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의 언어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다. 특히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바리새인들의 지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내가 주장하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냉소했던 유대 총독 빌라도의 허무주의적 해석 역시 거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그 어떤 언어적 해석도 거부”했다.
갇히지 않는 진리
그럼 진리는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진리는 동요한다. 동요하는 진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을 흔들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현재를 지배하는 선명한 질서로부터 삶을 걷어내고, 우리로 하여금 일탈하며 발을 헛디디게 만들 것이다. 진리는 그렇게 주체의 삶을 흔들어 방황으로 이끈다. 현세에서의 안정된 삶이란 현실 질서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다. 진리에 복종하는 주체에게 현실의 흔들림은 필연적이고, 방황은 현실적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결국, 진리는 “강박증적 한계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적 방황의 여정 속에서 발명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중세의 진리에 대한 입장이었다. 반면 그 이후, 계몽주의 시대엔 저 강박증적 한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디드로의 백과전서파 같은 이들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그야말로 백과사전에 모으려 했다. 이 이후,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가두고 장악한 “규범적 질서의 억압”에 저항하여 그 억압의 실패의 산 증인이 되곤 했다. 라캉과 저자는 그 사건을 히스테리라고 했다.
폐허와 환멸의 시대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신이 잊힌 뒤,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지구와 역사와 자신들을 이십 세기까지 꿋꿋이 밀고 나왔다. 그 후, 알다시피 그 이성이 이룩한 모든 것이 배반당하는 전쟁을 목도하게 된다. 살육과 파괴만이 가득한 폐허의 공백 뒤에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환멸을 떠안게 된다. 기존에 우리가 알던 모든 것을 버리자. 의심하자. 우리가 세상을 담고 표현하기 위해 배웠던 모든 지식과 방법과 기술을 폐기하자. 결국, 예술은 해체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간다.
반면 불안한 사람들은 새로운 신의 도래를 기원한다. 자본주의는 이에 응답하며 상품과 브랜드와 디자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화폐로 가치 전환 된다. 신의 자리에 신자유주의가 재위한다. 광고와 홍보와 마케팅과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를 신하로 거느리며.
일부 사람들은 이에 저항한다. “우리의 주체성과 의식이란 현세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에 의해 생산된 환영적 효과에 불과하므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고정관념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주체의 욕망이란 라깡이 대타자라고 부르는 세계 언어ㆍ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윤리적 실천이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를 위해 필연성 대신 우연성에 기대어 예술을 “실천”했다.
아름다움은 선보다 멀리 간다.
저자는 발튀스의 그림, 그것이 말하는 의미를 말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환상은 환상으로 극복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발튀스의 그림들은 위험하다. 그의 성적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위험한 그림은 수도사와 같은 작업 속에서 탄생했다. 그는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스튜디오에서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고 수십 시간, 수십 일을 하나의 그림에 매달렸다고 한다. 뭔가, 부조화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장거리 달리기 주자가 만나는 러너스 하이, 불교 신자들이 삼천 배 이후 만나는 어떤 감정, 일부 신자들의 방언과 반복되는 통성 기도를 통해 만나는 불가사의한 감정들이 있음을.
이 세계의 법과 언어가 우리에게 내미는 환상, 그것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 이후 맞이하는 것은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세상의 법과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종교적인 단어, 법열, 즉 엑스터시라고,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로는 주이상스라 표현했다.
그것-법열, 엑스터시, 주이상스-은 “의미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으로 모호한 상태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 “설명될 수 없는 욕망의 출몰은 마음을 통제하는 규범의 세계를 흔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이 흔들림은 주체를 카오스로 몰고 간다. 이것을 중세의 종교적 세계가, 또 그 이후 이성의 세계가 가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터, 결국 “서구 미술은 이것에 접근하려는 욕망과, 접근을 통제하려는 교회 권력의 양극단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 왔다. 그 이후 그 통제의 권력은 완벽한 구도와 수학적 계산이 바탕이 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화가들이 담당했고.
반복은 반복으로 극복한다.
이 사회의 규범과 지식과 종교적 권력과 권위는 자신들의 한계를 벗어나는 감각과 아름다움을 경계한다. 만질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은 아웃사이더로 남아야 했다. 마녀와 신비주의와 집시들처럼.
결국, 우리가 삶의 진실, 혹은 진리, 더 나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욕망과 마주하기 위해선, 그것을 만나기 위해선 “세계의 고정관념이 반복되는 것을 멈추기 위해 고안된 화가들의 특수한 반복 장치가 다시금 관객의 삶 속에서도 반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반복이 반복되어야”만 한다. 저자는 그 사실을 논증하기 위한 절차를 밟아왔다고 고백했다.
뭔가를 반복함으로써, 내게 주어진 이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난, 그 상투적인 감각을 초월한 뭔가를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는 니체와 들뢰즈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영원회귀와 주사위 게임과 생성의 철학에서 말이다. 저자는 물론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을 반복해야 하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어떤 것을 반복해야 엑스터시를 만날 수 있는지, 나를 동요시키는 무엇을 만날 수 있는지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건 각자의 몫이다.
발튀스는 그림을 통해 자신이 돌아가고 싶었던 유년기의 욕망을 재현했다. 그건 퇴행인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혐오해마지 않았던 오이디푸스 신드롬으로의 재귀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반복함으로써, 그 반복 속에서 작은 변화들을 쌓아감으로써 자신에게 큰 변화를 선사할지도 모른다. 그 무의미의 반복, 반복의 무의미를 통해 의미와 진리의 해일과 만날지도 모른다. 판단과 실천은 살아내는 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