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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01. 2023

불안들-레타나 살레츨

동해선에서 읽은 책 37

"주체가 선택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동일시되어 있을 경우 자유로운 개인은 흔히 자기 파괴의 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안>, 레나타 살레츨., P.11


"마찬가지로 불안이 없는 사회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이리라", P.272


잘 못 탄 버스, 뻔뻔한 사람

-요 근래 심사 의뢰가 자주 들어와서 울산이지만 낯선 동네에 가게 된다. 한 번은 택시를 타고 갔는데 두 번째, 그러니까 어제는 여유 있게 도착했기에 버스로 가는 걸 시도했다. 잘 못 타서 아산로 한가운데 내렸다. 자동차 출고장 쪽... 예전 같았으면 멘붕에 빠졌을 것이다. 


그냥 담담히 좀 걸어서 택시를 탔다. 네비로는 2분 늦게 도착... 심사를 받는 사람도 아니고 심사를 하는 사람이니 뭐.. 이런 심정으로 시원한 택시에서 느긋하게 기사 아저씨에게 울산 시내버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놨다. 정각에 전화가 왔다. 뻔뻔하게 "주차장입니다."하고 끊었다. 정확히 3분 늦었다. 


들어가면서 먼저 앉아있던 심사위원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그런데 시작을 안 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나면서 담당자에게 물었다. "언제 시작해요?", "아, 아직 한 분이 안 오셨었요."... 역시... 어딜 가나 나보다 독하고 미친놈은 있게 마련...


한 남자가 15분 늦게 왔다. 땀도 안 흘리고 느긋해 보였다. 당연히 사과도 안 했다. 마스크를 벗고 커피를 마시고.. 그 뒤로도 계속 마스크를 벗고 있었다. 다른 심사위원은 쓰고 있었다.


울산의 한 분야-워낙 좁은 분야라 말을 못 하는 걸 양해 바란다.-에서 저 정도 위치에 오르려면 저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나도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참고로... 심사위원장은 나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게 관례인데... 약간 불안했다. 다들 안 하다고 해서 담당자가 생일을 확인하러 갔다 왔는데... 울산대 교수님이 최고 연장자였다. 아... 피부가 하얗고 탱탱해서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리지 않을까 했는데...


신에게 불안을 맡긴 시간

-그러니까... 정확히 열네 살부터 서른네 살까지, 딱 이십 년 동안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주일을 빼먹지 않은 건 당연하고 성가대, 학생회와 청년회 회장, 주일학교 교사에 교회 밴드까지... 그러다 집사를 받고 그만뒀다. 그 뒤의 과제가 남았다. 이제 내 불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하지 마라, 근심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라는 성경 구절에 의지해 저 파란만장했던 십 대, 이 십 대를 버텼는데...


그때.. 일전에 얘기했듯이 우연히 라캉을 읽기 시작했다. 뭐랄까... 나라는 존재의 근원? 심연에 있는 나라는 인간의 욕망? 그 바닥을 알고 싶었다. 그 사이 나이를 먹고, 결혼도 하고... 박사 과정 공부하다가 반쯤 미칠 뻔도 했었다. 다행히도 딸이 태어나 아비를 정신 차리게 했고, 감독이 일을 주고 종종 대연동까지 찾아와 줘서 내가 카피라이터라는 사실을 각성시켜 준 덕에 여태껏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불안을 바라/바로 본다.

-전쟁, 실패, 사랑, 모성 안에 스며 있는 불안을 차근차근 탐색한다. 저자는 주요 사례 두어 가지를 골라 그 사례의 인물과 사건의 이면을 라캉의 이론을 메스 삼아 들춰본다. 해부해서 우리에게 그 살점들을 보여준다. 적나라하고 의심스러운 현상의 진짜 내부를... 더 나아가 마지막 장에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요즘 행하고 있는 유사 심리학계의 자기 독백과 이야기, 구술 등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도 파헤친다. 


리더십, 비전, 코칭, 멘토링 

-얼마 전에 카피 강사를 소개해달라고 누가 부탁을 받고 날 소개해줬다. 난 누가 날 필요로 한다고 하면 최대한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해 본다. 그 사람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든다. 그러나 사기꾼이나 내 기준으로 정신 나간 인간 같으면 사무적으로 사양한다. 이 사람이 그랬다. 


일단 목사인 것도 짜증 났는데, 조직 이름이 <리더십 비전 스쿨>이었다. 리더십과 비전을 가르치는 학교가 가능한가 싶고... 이 인간이 참여한 한 행사의 영상을 보니 4.15 총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는 현수막이 보였다. 뭐.. 그렇게라도 존재의 불안을 재우고 싶다면 할 말은 없다만... 안쓰럽기도 하고.. 다 늙어서...


난 코칭이나 멘토링을 좋아하지 않는다. 코칭이나 멘토링은 서로의 불안을 숨기는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 모종의 연대라고 본다. 평생 누구한테 그런 걸 받아본 적도 없고 누구한테 해 준 적도 없다. 같이 밥을 벌어먹는 후배에게는 종종 일에 관해서 해주는데 그마저도 들을 귀가 없다 싶으면 입을 닫는다. 


성경 말씀이 맞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건 아니니까. 다만 누군가 날 필요로 한다면 곁에 있어주려 한다. 보고 싶다는 후배가 있다고 하면 귀찮아도 나간다. 그냥 선배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말이 더 좋다. 그렇게 만나면 쓸데없는 얘기만 잔뜩 한다. 야한 얘기도 하고... 그러면 알아서 밝아져서 돌아간다.


사람이니까 그렇다.

-사람이니까 불안하다. 완벽한 가정에 완벽한 집에 살아도 거기엔 거미줄처럼 불안이 깃든다. 그 불안을 없애려는 건 결국 강박이다. 불안의 요소를 눈에 보이게 해서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가다듬고 정렬하는 것. 불안은 결여의 결여다. 비어 있는 것을 견디는 것이 불안을 이기는 것이다. 아니 그 불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사는 것일지도. 


사족...

-요즘 유희열이 표절을 했니 안 했니 말들이 있는 모양이다. 칼럼을 보내고 잠시 틈을 내어 책을 읽다가 종종 놀라곤 한다. 내 생각이 담긴 책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알게 모르게...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었다면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이 당연... 나 또한 은연중에 사고의 방식과 체계, 흐름, 관점이 내가 읽은 것들과 닮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 예전엔 불안해했을 거다. 그러나 요즘엔... 뭐... 하늘 아래 새것을 내놓는 인간이 어디 있겠냐.. 이런 심정 하나와... 뭐 몇 명이나 내 글을 읽겠냐.. 하는 심정으로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뭐 그래도 이번에 늦게 온 심사위원의 뻔뻔함에 비하면 아직 모자라다. 더 수양이 필요할 듯....(20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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