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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06. 2023

이 치열한 무력을 - 사사키 아타루

동해선에서 읽은 책 38

'읽을 수 없다면 쓸 수도 없습니다. 이때의 읽기는 필연적으로 '다르게 읽기'를 의미하죠.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건 똑같은 행위가 아니거든요.... 이런 식으로 모든 집필 행위는 오랫동안 인생의 지하수처럼 숨어 흐르던 그 무엇이 불현듯 솟아나는 경험을 동반합니다."-<이 치열한 무력을>, 사사키 아타루, 53~54.


내 이럴 줄 알았다. 읽기 시작하면, 술술 넘어가는 IPA처럼 꿀떡꿀떡 들이킬 줄 알았다. 그래서 책들 사이에 두텁게 숨겨놨건만 그 책 등걸이 봄날에 핀 개나리처럼 사람 눈을 현혹하는 통에 결국 붙잡고 읽고 말았다. 그 결과,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 글은 종일 촬영장에 있다가 열시반쯤 들어온 사내가 맥주와 크래미 몇 개로 끼니를 때운 후 남은 맥주를 마시면서 쓰는 글이다. 그만큼 이 글은 나오고 싶다고 내게 안달을 했다. 


인문학은 언어와 대화의 학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전 후배 민우와 유튜브를 한 적이 있다. "선배, 제가 A가 정말 필요해서 샀다고 하면, 선배는 그걸 아주 대차게 까주시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우린 제법 앞서갔다. 김생민의 영수증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이런 얘기를 했으니까. 제품은 미백 치약 같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우린 그 속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냈고, 나눴다. 물론 돈 안 되는 짓이어서 촬영하러 나갈 때마다 마누라 눈치를 봐야 했지만, 난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야, 이거 그냥 대본 없이 라이브로 가자, "했더니, "선배, 그럼 사회생활 못해요." 했다. 내가 그렇게 신랄한 건가? 아니면 내 말이 대부분 비방용인가? 필터가 없나? 어찌 됐든 조만간 해요 하다 미뤄졌다. 뿐인가, 역시 이 후배 녀석의 기획 아래 가람 씨-일전에 얘기했던 그 지적이고 센스 있는 여성-와 영화에 대해 나눴던 일대일 대화도 흥미진진했다. 나와 다른 나이의, 여성은 세상을 이렇게 보는구나, 하고 절로 겸손해졌었더랬다. 


역시 몇 해 전에 문수경 아티스트와 전래동화의 이면에 대해, 한 인터넷 언론사가 깔아준 유튜브 판에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어떤 분야든 고수랑 얘기하면 그 대화의 쾌감의 수준이 높구나 느꼈었다.


근본적으로 인문학은 읽음, 씀, 그리고 나눔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나눔은 대화를 통해 이뤄지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심지어 내가 전혀 모르는 일본 소설가와 나누는 아타루와의 대담에서조차 그 대화가 부러웠다. 


다 알 필요 없다. 

아타루를 읽으면서, 그리고 최근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들이다. 감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 그런데 난 한 번도 그에게 책을 권한적이 없다. 또 책을 읽지 않는다고 무시한 적도 없다. 그는 영상이라는 세계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 구도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취미든 일이든 그 분야를 깊이 파고 들어가 어떤 경지에 다다른 사람에겐 자연스레 존경심이 생긴다. 


그래서 난, 어떤 열정과 신념을 갖고 지금 행동하고 실천하는데 바쁜 사람이 굳이 읽고 글을 쓰는 데까지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는 주의다. 그런 사람들의 실천과 신념의 깊이에 감탄하여 글을 쓰라고 나 같은 인간들이 있는 게 아니겠나? 페북을 하면서 그런 분들을 알게 됐고 처음으로 감탄한 페북친구에 대해 첫 글을 썼고, 지금 두 번째 친구에 대해 쓰기 위해 준비 중이다.


책도, 공부도 마찬가지다. 

니체만 알아도 된다. 헤겔만 알아도 된다. 나처럼 몇 년간 라캉이나 바르트, 하루키에 관해 읽어도 된다.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라캉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해도 된다. 우물의 깊이는 우물 스스로가 아니라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저 후배 같은 놈만이 알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 일방적인 인문학 강연이 많아진다고 사람들이 다 인문학적이 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우물의 깊이를 남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를 제대로 알면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있다. 

마지막 대담에서 아타루는 원자력 폐기물에 대해 얘기한다. 이 시기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있던 직후였다. 노르웨이에 있는 방사선 폐기물 저장소에서 그 방사선 물질이 없어지는데 십 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위험에 대해 아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 핵 폐기물이 있습니다.라고 노르웨이어로 써 놔도 10만 년 후에 노르웨이어가 존재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한 지는 기껏해야 5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대한 무력함을 마음에 새겨 주세요."


자신들의 과오를 시간에 맡겨 해결하려는 인간의 교만함을 그는 자신의 전공이자 필살기인 언어라는 학문, 법이라는 체계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와 번갈아 읽다가...

결국 <이 치열한 무력을>을 가파르게 읽어나갔다. 오늘 촬영장에서 촬영이 딜레이 되는 동안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읽었을 정도다. 진중권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고, 사사키 아타루는 나와 동년배다. 아타루가 <야전과 영원>을 썼을 때의 나이와 진중권이 <미학 오디세이>를 썼을 때의 나이는 얼추 비슷하다. 그래서인 둘 다 호쾌한 박력과 경쾌한 농담과 냉소가 있다.  이것은 모든 걸 두루 알거나, 안다고 자부하거나, 또는 세상이 모든 걸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 수시로 패널로 불러대는, 여기저기 참견하는 이의 경박함에선 나올 수 없다. 오직 하나를 제대로 아는, 알아낸 이의 확신의 깊이에서 나온다. 진중권은 비트겐슈타인과 발터벤야민을 비롯한 미학, 아타루는 헤겔, 니체, 르장드르, 라캉과 푸코. 


한 작가가 아타루의 집에 놀러 가서... 

"에.. 야 책 정말 없다. 이것만 갖고 <야전과 영원>을 썼단 말이야."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 스스로 <이 치열한 무력을>에 실린 한 좌담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협소한 깊은 지식이 그의 문장을 힘 있게 한다. 가벼운 농담에도 귀를 기울이게 한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도 그런 매력이 있다. 그가 오직 미학만 제대로 알고 있었을 때 쓴 글엔 그만이 할 수 있었던 농담과 군살 없는 문장이 있었던 것이다.


난 진중권을 두세  번 본 적 있다.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그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대학원 건물 앞을 지나가곤 했다. 하나의 강의를 위해 그는 그렇게 철저히 준비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교가 대기업에 팔리고 나서 제일 먼저 쫓겨난 사람이 됐다. 당시 그 기업이 정부의 비위에 맞추느라 그랬다는 후문이 학교에 떠돌았다. 그 후로 학과들이 통폐합되기 시작했고... 어쩌면 그를 미학 밖의 세상, 전혀 미학적이지 않은 언론과 정치판으로 쫓아낸 것은 이 시기부터 아닐까? 조국 사태 때부터가 아니라.

두 책을 번갈아 읽고 있었다. 원래 산만한 사람이니까, 어차피 이렇게 읽어도 뭐 굳이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카피라이터의 일의 폭풍은 지나갔고, 그 폭풍은 감독에게 갔다. 난 그 세력이 약해진 태풍의 후위를 달래고 있는 중이다. 20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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