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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pr 18. 2023

충동의 몽타주;충동에 관한 18개의 텍스트

동해선에서 읽은 책 39

"우리는 우주가 시작한 순간 던져진 주사위-부모의 욕망이 우리를 존재하게 했다-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의 욕망이 우리 자신의 욕망의 원인으로서 작동하는 곳에 우리는 존재한다.", 브루스 핑크, 《욕망과 충동》,  <충동의 몽타주: 충동에 관한 18개의 텍스트>, P120.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 번도 탐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 니체,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판본, pp.11~12


오래된 숙제

-반복해서 말했지만, 어느 날 문득, 본래의 나는 누구였는지 막연해져서 인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라깡을 중심으로 그 탐구의 동심원을 넓혀갔다.


첫 번째 질문은 "나는 무슨 욕망을 갖고 있는가"였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찾았고, 그 욕망을 어느 정도는 실천했다. 그리고 그것을 욕망하는 나를 나로 인정하고 있다. 그 욕망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기에 내가 긍정하는 나 또한 당연히 여럿이다.


두 번째 질문은, "나는 왜 이런 욕망을 갖고 있는가"였다. 거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답을 찾았고 그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거나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갖다 대기 위해 애쓰지 않고 그저 그 욕망을 실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남은 숙제

-그러나 여전히 숙제는 남아 있다. "왜 나는 여전히 충동적으로 그것을 욕망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어떤 욕망은 스스로 봐도 누구한테 뒤지지 않을 만큼 실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욕망에 대한 충동이 사라지지 않고,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내 일상을 지배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라캉이나 프로이트, 또는 에리히 프롬과 하이데거의 책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욕망은 원래 그런 것이다. 항상 잔여물을 남긴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 전달되지 못한 내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그래서 "사랑"이라는 기표로는 내 마음의 의미, 즉 기의를 다 전달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살면서, 그 잔여물이 불쑥 물먼지를 일으키듯 내 일상을 흔들 때다. 해결됐다고 생각했던 사건에서 갑자기 결정적 증거나 증언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움직이는 과녁, 불쑥 튕겨져 나가는 화살

-한 연예인의 아파트 현관이 도라에몽 인형으로 꽉 찬 걸 봤다. 이해했다. A를 향한 욕망은 연속해서 A1, A2, A3...... Ax를 부른다. 그 개별 도라에몽들이 다르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라에몽이어서 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생겨, 그 다름을 열정적으로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소위 작은 대상이라 불리는, 쉽게 말하면 도라에몽의 작은 차이다. 충동은 그렇게 날 움직이게 해서 살아있게 한다. 동물적 본능과는 달리 선명한 기표를 향해, 아니 어쩌면 그 기표를 볼 때 충동은 꿈틀대며 날 움직이게 한다.


증오와 사랑의 공통점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욕망하는 것에서 나를 찾는 것만큼 내가 증오하는 것에서도 나를 찾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 안의 분노나 혐오의 대상과 그 이유, 또 그것이 내 과거, 특히 십 대와 이십 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됐다. 오늘의 분노는 아주 먼 시절의 그것에 향해 있었다. 아니 그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한 때 아주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주 증오해마지 않는 그런 것이다.


결국 차갑게 응시한다.

-그렇게 진짜 분노의 원인, 상처의 원인, 또는 억압의 원인을 차갑게 보고 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다. 남은 인생의 힘과 지성을 모아 그것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하고 있다. 니체의 글에서 드러난 그의 분노에 공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다들 그러고 산다.

-저번 주 토요일, 딸이 주산을 배우는 서면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딸을 데려다줄 때, 그리고 딸이 공부하는 동안 서점으로 움직일 때, 그렇게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이 특정 브랜드의 윈드 브레이커와 피쉬테일 파카를 입은 걸 봤다. 처음엔 무슨 브랜드인지 몰랐다. 우연히 그 브랜드를 입은 여자가 가까이 서 있어서 자세히 봤더니 영어로 몽클레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몽클레어였다.


다들 다른 충동으로 같은 브랜드의 비슷한 제품을 샀다. 난 충동이 없는 것보다 충동이 같은 현상으로 해소되는 것이 더 슬프다고 본다. 충동의 원인은 다 다를 텐데 같은 소비로 해소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 이 자본주의에 휩쓸려 산다는 증거이니까...


우리도 결국 그러기로 했다.

-아내나 나나 한 직업을 오래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업계에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 원래 포멀 하게 입던 아내는 더 신경 쓰기 시작했고, 나도 최근의 미팅에서 셔츠와 재킷을 입고 갔다. 아내는 나에게 이제 좀 좋은 옷을 입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나도 이십 년 가까이 된 바람막이를 치우고 평소 좋아하는 피엘라벤이나 LL빈 같은 브랜드의 고어텍스를 사고 싶지만... 언제 야외에 가겠나 싶어서 참고 있다. 어쩌면 올해 내 생일 때, 장모님과 처남이 금일봉을 건네면 그때 생각해 볼 수도....


사족...

얼마 전, 브런치 사이트를 통해 한 출판사로부터 신간 소설에 대한 특별 리뷰어를 뽑는다는 메일이 왔다. 뭐... 나를 특별히 원한 건 아니고 <책리뷰>를 키워드로 해서 검색하다 보니 내가 걸린 듯하다.


관련 메일을 보고 구글폼에 실린 소설의 내용도 들여다봤다. 대단하긴 하지만 흥미롭지 않았다. <소피의 세계>나 <모모>를 떠올리기도 하고... 게다가 분량이 600페이지가 넘었다. 그렇게 두꺼운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보자... <임프리마투르>가 마지막이었나?


여하간 그래서... 안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렇다고 무시하고 뭉개고 있긴 뭐해서 첨부된 메일 주소로 간략히 거절 메일을 보냈다. "제 취향의 소설이 아니어서 사양하겠습니다. 좋은 반응을 얻길 기원합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바쁘신 와중에 회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일이 다 잘 되시길 바랍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수십 개의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거의 다 딱지를 맞는 동안 느낀 것이 있는데... 체계가 있고 경우가 있는 출판사는 언제나 거절 메일을 보낸다는 것이다. 참고로... 처음 투고를 할 때, 부산에 있는 출판사에만 메일을 보냈는데, 거절 메일을 보낸 출판사는 한 곳도 없었다. 기억하고 있다. 일전에 말했다시피... 응.. 언젠간 갚아줄 날이 있지 않을까? 뭐..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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