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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의 조건

영화의 위로 : 퍼펙트 데이즈(2023)

by 최영훈

직원을 제외하면, 병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 환자와 보호자다. 유니폼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다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은 일상이 깨진 사람이다. 환자와 보호자가 처한 조건은 다른 듯, 닮아 있다.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고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며 자고 싶은 곳에서 자지 못한다. 출근과 등교는 정지되고 사적인 만남 또한 미뤄진다. 취미 생활은 고사하고 TV를 통해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도 보지 못한다. 때문에 나와 같은 보호자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입원한 환자도 가장 바라는 건 하나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 잠시 짬이 났을 때, 이 영화를 집에서 봤다.


마음을 흔드는 심심한 이야기

내용은 한 줄 요약이 가능하다. 도쿄의 공중 화장실 청소로 생계를 꾸려가는 한 사내의 일상 이야기다. 이 간단한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없다. 나이도, 과거도 분명치 않다. 듣는 음악과 읽는 책으로, 그리고 그의 몸으로 가늠해보건대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넘어 보인다. 나이에 비해 가진 것도 없다. 책과 카세트테이프와 카세트 데크, 식물 몇 개, 그리고 그 모든 걸 품고 있는 낡은 다세대 주택과 일을 하기 위한 도구로 가득 차 있는 미니밴뿐이다. 그마저도 여전히 카세트테이프 작동을 위한 데크가 장착되어 있는 구형이다.


영화는 이런 그의 일상을 쫓는다. 밤과 낮의 바뀜을 통해 그 날짜를 가늠해 봐도 일주일 정도 될까? 만나는 사람도 없고 이렇다 할 사건도 없다. 당연히 같이 사는 사람도, 친구도, 친지도 없다. 새벽에 일어나서 도쿄 곳곳에 있는 공중 화장실로 가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청소를 한다. 일이 마무리되면 목욕탕에 가서 씻고 늘 가는 식당에 가서 늘 마시는 음료를 마시며 식사를 한다. 주말에는 빨래방에 가서 세탁을 하고 매일 찍는 나뭇잎이 담긴 필름을 맡기러 현상소에 간다. 내심 마음에 두고 있는 마담이 있는 술집에 가서 한 잔 하는 호사도 누린다. 이 심플한 이야기가 마음을 흔든다. 그 이유가 뭘까?


존재와 일상의 숭고함

이야깃거리가 됨직한 삶, 사건이 빈번한 삶을 외면한 후 안정감 있는 서사가 반복된다. 일주일, 한 달, 일 년 단위의 장대한 서사가 아닌 예측되는 하루, 그 하루의 반복으로 굴곡 없는 서사가 누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굴곡 없는 서사 속에 감춰진 가치가 있다. 그 반복 속에 다름이 있다. 같은 하루란 없고, 설령 같더라도 그 하루의 가치는 절대적이어서 살아있는 인간이 마주하는 하루, 하루에 담긴 숭고함이 있다. 결국 어느 것도 반복되지 않는 서사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휴식을 취하지만 어느 것도 어제와 같지 않은 일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삶의 숭고함이 피어난다. 그 숭고함을 발견한 사람은 서사를 내면으로 흐르게 한다. 내면으로 흐르는 서사, 그런 서사에 무게 중심을 둔 삶은 과시되지 않는 삶이고, 밖으로 흐르는, 전시를 거부하는 삶이다.


아날로그적인 투명한 일상

전시되지 않는 것들은 안으로, 육체적으로 독해된다. 그 운동을 읽는 이, 보는 이, 듣는 이에게 보여준다. 아날로그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카세트테이프는 톱니바퀴의 원운동을 통해 릴 테이프를 움직여 읽힌다. 읽힌 음악은 스피커를 통해 전해진다. 음악이 작동되는 것과 소리로 발현되는 것, 그 모두를 볼 수 있다. 그래서 LP와 카세트테이프를 작동시키는 것은 일종의 수공(手工)이다. 기계의 일에 사람의 손이 참여한다. 주인공 히라야마가 그랬듯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면 그 중간에 볼펜을 끼워 감고 심지어 잠시 냉동실에 넣기까지 한다. 필자 또한 그랬었다. LP를 깨끗하게 듣기 위해선 겉면을 닦아야 한다. 바늘 끝에 이물질이 묻었는지도 봐야 한다. 더 좋은 소리를 듣고 싶다면 앰프와 스피커도 신경 써야 한다. <무간도>에서는 스피커를 연결해 주는 케이블까지 바꿨을 정도였다.


디지털은 수공의 과정을 누락시킨다. 감상과 독해에서 사람의 개입을 물리친다. CD로 음악을 처음 들을 때, 그 음악을 연주하는 물성이 기계 안으로 은폐되는 것에 놀랐었다. 물론 투명한 덮개가 있는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설령 그 덮개를 통해 돌아가는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돌아감의 회전수를 감지하는 건 인간의 시력이 가진 능력, 그 밖의 일이었다. CD는 CDP와 협력하여 디지털 신호로 저장된 음악을 송출할 뿐, 인간의 수공을 거절한다. 음악을 트는 과정에서 인간의 손은 소외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전자책이 종이 책과 다른 점이야 여럿이겠지만, 이 영화의 맥락에서 보면 손의 개입 여부가 절대적인 차이다. 전자책은 페이지를 넘기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스크롤의 연쇄가 페이지와 페이지를 잇는다. 그렇다. 책은 한 장의 종이의 앞뒷면에서도 텍스트의 단절이 잠시 일어난다. 그 잠깐의 순간, 단어와 단어의 순간적 결별, 그 짧은 순간 동안 우리는 텍스트의 목마름을 느낀다. 이 페이지의 맨 밑에서 다음 페이지의 맨 위로의 도약, 그 짧은 부양의 시간 동안 우리는 잠시 텍스트의 허기를 경험한다. 그 목마름과 허기의 반복 속에 텍스트는 더 곱씹힌다.


전시 없는 삶

전시를 거부하는 삶은 본질에 다가선다. 영화를 보면서 난 그가 들었던 음악과 책의 제목과 그 내용보다는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에 더 시선이 갔다. 그의, 읽은 문고본과 음악을 들은 카세트테이프의 공통점은 모든 제품의 사이즈가 같다는 것이다.


카세트테이프는 케이스와 구성물의 사이즈가 세계적으로 동일하다. CD의 경우, 디스크와 플라스틱 케이스의 사이즈는 동일하지만 그 겉을 싼 종이 케이스는 나라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 의외로 들쑥날쑥하다. 반면, 카세트테이프의 경우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 같은 일부 러닝타임이 긴 클래식 음반을 제외하면 그 내용물과 케이스, 케이스의 포장재의 크기까지 동일하다.


문고본도 마찬가지다. 한 회사의 것만 산다면 다 동일하다. 크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두께까지 조절하는 회사도 있다. 그의 책장을 유심히 보면 같은 회사에서 나온 문고본들이 꽂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크기가 동일한 카세트테이프와 문고본의 본질은 휴대와 저장의 편의성이다. 크기가 들쑥날쑥하지 않기 때문에 제한된 면적에 최대한 많은 개수를 저장할 수 있다. 짐을 줄이고자 하는 이에게 걸맞은 매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선 또 하나의 장점이 더 발견된다. 그의 책꽂이와 카세트테이프 수납장은 전시의 용도가 아니다. 책과 음반을 과시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문고본과 카세트테이프만으로도 충분하다.


일에 대한 숭고한 자세

전시를 거부하는 삶은 일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주인공 히라야마가 마치 도자기를 빚는 장인처럼, 다기를 만지는 다도의 예인처럼 정성을 들여 화장실 청소를 할 때, 젊은 동료는 그 열심과 정성에 의문을 던진다. 우선, 화장실은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는 일터다.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아 그 성과가 미비하여 일하는 이를 돋보이게 하지 않는 일은 하찮은 일이다. 이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찮은 대접, 심지어 도외시되곤 한다. 히라야마는 일의 하찮음을 존재의 하찮음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젊은 동료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다.


영화 속 도쿄의 공중화장실은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동일하다. 동일함은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기에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도 그 차이가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누구도 그걸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 내에 할당된 수의 화장실을 돌며 청소라는 행위를, 그 행위를 했음을, 그전과 후의 차이만 인식될 수 있을 만큼 청소를 하면 그 행위는 완수되고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청소를 한다. 더 잘하기 위해 자신만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그것은 마치 화장실에 숨겨 놓은 쪽지로 익명의 고객과 하는 빙고 게임과 같다.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다. 그 함으로 인해 나와 타자, 모두 즐겁다. 어쩌면 공동체는 그렇게 유지되고 그 균형을 유지하는지도 모른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은 화려하다. 다 다르게 생겼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내부는 기능적으로 동일하고 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 또한 동일하다. 성별, 연령, 국적, 직업에 상관없이 그 안,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은 배설을 수행한다. 그곳을 청소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화장실의 외관에 따라 청소의 질과 양이 달라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화장실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 그곳의 청소는 일상의 엄숙함, 사람의 사람다움을 유지시켜 주는 최후의 보루, 그 자체를 의미한다.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오늘, 이 순간 하루를 견뎌내는 모든 존엄한 존재에 대한 예의와 예우의 표현이다. 그 화장실 앞에서 그곳을 청소하는 이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존엄한 타자를, 더 나아가 자신까지 파괴하는 행위다.


일상을 흔드는 불안 1-과거

이렇듯, 히라야마의 서사는 안정되어 있다. 그로 인해 숭고함을 유지한다. 마치 조용한 박물관의 관객이 없는 전시실 같은 일상이다. 지금, 이 순간 자족한다. 그런 그의 과거는 생략되어 있다. 관객들은 그가 듣는 음악과 읽는 책으로 그의 전성기를 짐작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의 음악으로 인생의 OST를 채우니 말이다. 그걸 제외하면 그의 과거는 현실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는 달라붙어 있다. 그가 꾸는 꿈들은 흑백으로 처리되는 반면 그의 지루한 일상은 컬러다. 히라야마는 오히려 반복된 일상의 선명한 힘으로 과거를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과거는 문신처럼 통제할 수 없는 악몽처럼 그를 찾아온다. 불쑥 찾아온 조카와 그 조카를 데려가기 위해 온 여동생처럼 말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색을 잃고 저편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그 과거는 싫든 좋든 우리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히라야마가 키우는 작은 식물들이 그 솟아났던 토양을 벗어나 히라야마의 방 한편에서 클 수 있는 건 식물의 뿌리와 히라야마가 매일 반복해서 주는 물, 그리고 인공조명 때문이다. 그 빈약한 물과 조명만으로도 식물들은 위로, 미래를 향해 성장한다. 어제 들인 정성으로 오늘 성장하는 것이고 오늘의 성장을 반복하여 언젠간 거목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모든 거목은 묘목의 시기를 거쳤다.


완벽한 날이 오기 전

한병철이 <관조하는 삶>과 <리추얼의 종말>에서 말했던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차이를 발견하는 힘, 나이를 먹어도 삶에선 여전히 배울 것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 그러한 배움과 경험의 현장으로 자신을 던질 수 있는 힘은 멈춤과 반복, 반복과 멈춤에서 나온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반복은 같은 것의 재생이 아니다.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스님들의 수행과 같다.


매년 반복되는 하안거나 동안거, 지루하게 이어지는 면벽수도, 심지어 사찰에서 반복하는 울력에서도 수행자는 차이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발견과 깨달음은 알아챔으로부터 나오고, 알아챔은 멈춰 보는 것, 관조로부터 나온다. 멈춤과 관조는 세상의 속도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홀로 서 있는 것이고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속도로 가는 것이다.


반복하여 성스럽게 수행하는 행위는 리추얼이다. 소위 돈이 안 되는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여 의식(儀式)과 예식(禮式)을 갖춰, 지켜 반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주인공은 그걸 해냈고 해나가고 있다. 히라야마의 청소 행위는 성당의 미사를 준비하는 과정, 사찰에서 새벽 예불을 준비하는 과정, 제사를 드리기 전 제기 하나하나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 과정과 닮아 있다. 이러한 반복 속에 자신의 의식을 눈앞의 사물이 아닌 더 먼 곳으로 보낸다. 매일 직면하는 반복되는 사소한 것들에 정성을 쏟으면서 잡념을 가라앉히고 지금 이 순간의 자신에게 몰입하여 만난다. 자신을 찾고 만나보겠다고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녔던 나를 용서하며 스스로에게 “이제 평안하라.”하고 말해준다.


리추얼은 맺음을, 맺음은 인생의 마디를 만들어준다. 맺음의 행사는, 한병철이 앞선 책에서 말했듯이, 백일, 돌, 졸업식,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과 같은 출발과 끝이 공존하는 시간과 공간의 장(場)이다. 그 맺음들은 마디와 굴곡으로 기록된다. 그것을 갖고 있는 이에게 과거의 동일한 사건은 충격이 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런 자극이 되는 사건을 만들지 않거나 더 이상 그런 맺음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결국, 수많은 마디를 지니고 있는 노년엔 자극적인 이벤트가 필요 없다. 아니 그 이벤트 자체를 경험의 마디로 수용한다. 들뜨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는다. 애석하게도, 새로울 것 없는 순간이 도래한다. 새로움은 오지도 않고 발생하지도 않는다. 그저 발견될 뿐이다.


그렇게 인생의 모든 순간은 받아들인 경험으로, 인생이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는 걸 안다. 히라야마의 젊은 동료가 늘 10점 만정에 몇 점으로 상황과 사물, 사건을 평가한 것 같이, 그렇게 모든 것의 가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 동료가 무책임하게 그만둔 후 성실한 동료가 그 자리에 온 것처럼 하나의 마디 뒤에 어떤 줄기가 뻗어나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란 것도 안다.


때문에 기대도, 헛된 바람도 없다. 히라야마의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은 젊은 여성이 다 들은 후 그의 볼에 뽀뽀를 해 줬을 때, 작은 기쁨이 찾아왔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나이가 들면 삶을 받아들인다. 경계와 한계를 알고 욕망으로 인해 흔들리지도 않는다. 새로운 마디, 인생의 변곡점을 만드는 고통은 이젠 됐다. 반면 젊은 여성은 불안하다. 하나의 마디조자 없이 연약한 줄기 하나만 겨우 세상에 내놓은 존재다. 인생이 돌아가는 것이 보이는 카세트테이프와 같다면, 그래서 어느 정도 빨리 감기를 하면 어떤 노래가 아는 것처럼 얼마큼 견디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나날들이 도래하는지 알면 젊음의 불안은 멈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투명하지 않기에 매번 겪으며 마디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이미 마디를 수없이 만든 노인도 타자의 마디를 만들어 줄 수 없다.


일상을 흔드는 불안 2 - 욕망

다시 말하지만, 밖으로 차고 넘치는 서사를 멈추면 서사는 안으로, 내면으로 흐른다. 내밀하고 파동이 적은 내면의 서사, 그 흐름을 만끽하는 이의 시선엔 외부와 타자의 서사가 감지된다. 사물과 식물과 세계의 자잘하고 미세한 변화들, 그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잔가지들. 그 잔가지들의 떨림만으로도 충분히 일상에 선율을 가져올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하고 행복할 수 있다.


그 자잘하고 사소한 차이의 포착, 그 포착으로 발생하는 기쁨과 만족에 기대어 이 초로의 남자는 화려했던 시절의 욕망을 잠재우고 고요한 일상을 유지한다. 그렇게 눌러진 욕망은 침묵과 반복 속에서 유폐된다. 마치 침묵 수도원처럼, 묵언 수행처럼. 말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욕망의 파편들은 꿈속에서만 출렁인다. 막을 수 없었던 타자의 습격으로만 욕망이 출렁인다. 과거와 조우를 통해서 욕망이 출렁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욕망은 견고한 일상 안에 눌러진다.


물론 삐져나오는 잔여 된 욕망, 실현 가능해 보이는 욕망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그 욕망이 무산될 때, 작은 좌절을 선사하기도 한다. 욕망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히라야마가 새벽마다 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때, 그의 시선을 태양과 하늘을 향할 때, 그의 뒤로는 그림자가 생긴다. 그가 작은 박스카로 도쿄 도심을 누비고 자전거로 단골 식당과 목욕탕과 세탁소와 서점 등을 전전할 때, 도심의 욕망이 응축된 인공 구조물 스카이 트리를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거기 가 있지 않고 그의 욕망 또한 저 높은 곳을 향하지 않지만 그 스카이 트리는, 자본주의와 건축공학기술의 정점에 있는 그 구조물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스카이 트리는 모른다. 높고 클수록, 거대할수록 그림자도 그렇게 길고 커진다는 것을. 인공적인 것들, 의식이 없는 것들은 스스로를 인식 못하고 자신이 만든 그림자도 인식 못한다. 욕망에 눈이 먼 존재들은 모두 주체에 대한 인식은 물론이고 자신의 뒤에 드리워진, 그리하여 타자의 발밑을 어둡게 만들 수도 있을 그림자를 인식 못한다. 이 인식이 없는 사람은,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즉자적인 존재일 뿐이다.


황혼에 이르러 보이는 것

영화의 막바지, 두 남자의 그림자밝기는, 그래서 애처롭다. 해가 다 진 강변, 두 남자는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짧은 대화를 나눈다. 암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둔 마담의 전 남편이 무심히 질문을 던진다.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짙게 보일까요?”, 주인공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남자가 여전히 모르는 걸 모른 채 떠나게 됐다고 아쉬워한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주인공은 지금 그림자를 겹쳐보고 그 색이 진해졌는지, 그대로인지 알아보자고 한다. 이후, 그림자밟기 놀이를 제안하고, 둘은 잠시 그림자밟기를 한다. 물론 금세 지쳐버리지만.


애처롭다. 태양의 높이가 낮을 때 그림자의 길이는 가장 길다. 해가 지려 할 때, 그제야 우린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인생의 저녁, 황혼에 말이다. 욕망이 찬연(燦然)하게 우리의 인생을 채울 때, 정작 우리는 그 욕망의 크기도, 그늘도 보지 못한다. 위에서 내리꽂는 태양이 우리의 그림자를 내 발밑에 숨기듯이.


결국, 찬연한 욕망이 그 빛을 잃어갈 때, 인생의 정점에서 내려올 때, 우린 인생을 뒤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우린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타자에 대한 연민도 이때 생기는 지도. 그 그림자를 모른 채 살아온 나에 어리석음과 너에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면서. 그러나 그 다짐을 지키기엔 인생이 너무 조금밖에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면서.


인생 ; 고독과 죽음의 불안을 껴안고 사는 것

그 출렁이는 욕망을 매번 이겨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이 잊고 싶을 정도로 험난했던 과거를 떨쳐낸 뒤 누리게 된 일상은 완벽하다. 영화 제목처럼 완벽한 날은 지금 이 순간이다. 어제와 같은 듯하나, 완전히 다른 오늘. 아니다. 어쩌면 완벽한 날은 내일일지도 모른다. 오늘과 다른 차별화된 감동, 차이를 품고 있는 감동이 기다리고 있을 그날이.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야말로 “퍼펙트 데이즈”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날이 아니라 완벽한 날들이 되기 위해선 어제도, 오늘도 평안하며, 내일도 같을 것이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늘 같은 술을 마시고, 같은 음식을 먹고, 안 그래도 저렴한 문고본 책을 중고서점에서 사들여 읽는 삶이어도 이 삶에 아무런 사건도 침입하지 않아 그 하루가 반복될 수 있다면 “퍼펙트 데이즈”인지도 모른다.


그날은, 다시 말하지만, 발견되고 창조된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는 것, 정성 들여 화초를 키우는 것, 늘 가는 식당에 가는 것, 그 모든 것들은 무탈한 일상의 반복, 그것의 중요함과 그것이 주는 행복과 안온함을 웅변한다. 반면 소주나 청주를 물로 희석시킨 미즈와리를 마시는 것, 코모레비라 불리는 같은 나뭇잎의 매일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 반복 속에 웅크리고 있는 차이의 생동감을 웅변한다. 하여, 삶은 일본의 전통 종이접기 공예인 오리가미처럼 같은 면적의 종이로 매번 다른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있다.


그 완벽한 날 안에 웅크려 있는 것도 있다. 들리는 사람에게만 간신히 들리는 메시지가 있다. 물러나 있는 사람은 고독을, 그리고 혼자 맞을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 더 이상 굴곡이 없는 삶, 마디를 생성하지 않는 평온한 삶, 그 일상을 선택한 삯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러나서 보는 사람만이 고독과 죽음이 던지는 불안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명징하고 명백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 스카이 트리에, 화려한 도쿄의 스카이라인에 시선을 뺏기는 동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준엄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


어쩌면 히라야마가 보여준 마지막 표정, 그 눈에 가득했던 눈물은 생의 끝자락에도 여전히 펄럭이는 욕망, 그것의 힘없는 나부낌을 목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그 욕망을 내 것으로 하고, 그로 인해 인생의 새로운 마디가 만들어질 때의 고통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른다. 또, 그래서,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잔불처럼 남아 있는 욕망을 뒤로하고 어제와 같은 일상을 유지하기로 결심한 뒤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과 고독이 기다리고 인생의 끝을 향해 묵묵히 살아나가야 하는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사르트르를 인용하자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꼰대적 사족임을 알면서도 한마디 덧붙이면. 노래의 제목과 가사를 분석하고 읽는 책의 제목과 내용을 샅샅이 찾아내어 분석하여 <명탐정 코난>처럼 퍼즐 맞추듯, 퀴즈를 풀 듯 영화의 의미를 확장해 가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 보기다. 영화관에서 본다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을 것을 일시정지와 검색으로 발견하고 찾아내어 나만 본 것처럼 말하며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영화 보기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영화를 너무 강박적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최소한 <퍼펙트 데이즈> 같은 영화라면. <해리 포터>는 그렇게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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