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25
몇 해 전, 딸 덕분에 도서관을 다시 가게 됐다. 그동안 난 집요하게 폭을 좁혀서 꼭 읽고 싶은 책만, 사서 읽는 것을 선호해 왔다. 우리 가족 중 대출 카드를 가장 먼저 만든 사람도 딸이다. 집에 책을 읽는 사람이 두 명으로 늘면서 그 값과 폭도 함께 증가하여 부득이하에 도서관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가던 남구 도서관이 2025년 내내, 내부 공사로 인해 문을 닫는다. 결국 딸과 나는 버스로는 두 정거장, 걸으면 20분 정도 떨어진 우암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책도 그 도서관이 아니었으면 빌리지도 않았을 테고, 이 글의 방향 또한 그 도서관이 아니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요한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면 제가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의 거의 모든 책을 저는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책의 99.999999퍼센트를 저는 아직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집니다. 제가 모르는 세계가, 그리고 자칫하면 제가 죽을 때까지 모르고 끝날 세계가 그만큼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종교적이기까지 한 감동을 느낍니다.”, pp.21~22
“도서관의 사명은 ‘무지의 가시화’입니다. 자신이 얼만큼 무지한가를 깨닫는 것, 지금도 무지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아마 무지한 채로 끝나리라는 사실 말이죠. 자신의 그 가공할 만한 무지 앞에서 전율하는 것이 도서관에서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에서 도서관은 ‘무지의 앎’의 공간으로서 표상되죠.”, P.73
우암 도서관은 우리 집 옆에 있는 행정복지센터보다 작다. 붉은색 벽돌로 외관이 장식된 도서관은 3층으로, 어지간한 스타벅스만 한 규모다. 그런데 이 작은 건물 1층엔 책이 없다. 2층에 가야 서가가 있고 3층까지 터진 그 공간의 높은 벽에 붙은 책꽂이에 약간의 책이 꽂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 책은 1,2년 각 잡고 읽으면 다 읽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의 양이 절대적으로 작다. 이 작은 공간에 서 있는 서가와 벽에 붙은 서가 사이에 열람 공간을 마련했다. 기다란 탁자에 의자를 뒀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공부 따위를 하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문드문 있다.
당연히 내가 읽고 싶은 책의 대부분은 없다. 아즈마 히로키나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의 책도 없고 당연하게도 들뢰즈나 레비나스, 심지어 우치다 다쓰루 선생의 책도 거의 없다. 선생이 이 책의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대여 빈도가 보장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가장 잘 보이는 곳,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꼰대 같은 나 같은 이의 입장에서는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그야말로 책을 꽉 채워도 모자랄 판인, 그런 규모의 도서관인데 1층엔 카페가 있고 옥상엔 그럴듯한 사진 스폿과 정원을 갖췄으며 청소년을 위한 아기자기한 계단식 벤치도 마련했다. 3층과 2층을 분리하지 않고 층고를 틔워서 답답함은 없앴으나 3층 대부분은 유명무실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주변에 새로 생기는 도서관들은 대체로 이렇게 작다. 책의 절대적 누적보단 “손님”의 편의성과 호감도 증가를 위해 그 공간을 설계하고 배치한다. 나 같은 꼰대 입장에선 이런 도서관에 들어가면 그 위용에 압도당하는 건 고사하고 동네 카페에 마실 간 기분이다. 30분 정도면 관장과 사서의 책 고르는 취향이 가늠되니 마치 책 좀 읽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간 기분도 든다. 이런 도서관의 역할은 뭘까?
일종의 입구 역할이다. 문턱이 낮다. 아니 아예 없다. 일단 책의 세계를 만만히 보고 들어와라. 아무거라도 읽어봐라. 그러다 하나 제대로 걸려라. 그다음엔? 더 큰 도서관에 가든지, 대형 서점에 가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일단 우린, 미끼 역할, 삐끼 역할, 얼굴 마담 역할을 하련다. 이런 거 아닐까?
앞서 인용한 저자의 문단에 등장하는 도서관은 파리국립도서관, 로잔 올림픽 박물관 도서관, 도쿄도립대학도서관 같은 대형 도서관이다. 그런 도서관에 가면 정말 압도당한다. 아니 그냥 어느 정도 이름 있는 대학의 도서관만 가도 그렇다.
학부 시절의 도서관은 폐쇄식 서가를 운영했다. 컴퓨터(그마저도 286인가 그랬다.)로 책을 검색해서 서명과 서지번호를 종이에 적어 사서에게 주면 사서가 그 책을 찾아다 주는 형태의 도서관이었다. 1학년 때, 한 번 그 답답함을 경험한 뒤, 난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도서관을 가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교수님에게 빌리거나 사서 읽었다.
그러다 대학원을, 서울의 제법 유명한 대학으로 갔는데, 마침 그 학교의 중앙도서관이 한 선배의 엄청난 후원을 통해 새로, 막 지어진 직후였다. 겉은 화강암 같은 돌로 만들어져, 과거 종로에 있던 조선총독부, 혹은 지방에 흔히 있는 법원 건물을 연상시키는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두오모가 있는 성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줬다.
5층인가, 6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중앙홀에선 그 방향으로 난 각 층의 통로가 보였다. 마치 복도식아파트처럼 말이다. 그 도서관에 처음 들어갈 때, 그래 이 정도 도서관이라면 등록금 낼만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압도되는 느낌, 그러니까 도서관에 대한 경외감은 이때 처음 들었다. 야,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채로 죽겠구나 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저자는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으로 재판(판단)의 기능, 치유(병원)의 기능, 교육의 기능, 종교의 기능을 꼽았다. 도서관은 좁게는 교육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자 기관이지만 넓게 보면 이 모든 것이 함축된 공간이다. 아무리 양보해도 치유와 교육, 그리고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 종교의 기능까지 갖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동네에서 흔히 보는 작은 도서관들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포교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거대한 사원과 심대한 진리와 신비를 숨긴 채, 마치 여름성경학교처럼 가볍고 즐겁게 많은 이들이 다가올 수 있도록 속세에 밀접해 있는 그런 곳들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읽고 싶은 책을 사지 않습니다.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을 사지요.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싶다고 느끼고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문해 능력을 갖춘, 언젠가는 충분히 지성적ㆍ정서적으로 성숙한 자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모종의 책을 책장에 꽂도록 이끕니다.”, P.118
필독서 따위는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갖고 있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와 관련한 일이 생각난다. 예전에 책을 한 번 내보겠다고 - 벌써 십 년 전쯤 일인데, 그때는 내가 글을 무지하게 잘 쓰는 줄 알았었다. 이렇게 사십 대와 오십 대의 자기 판단의 깊이가 다르다. 환갑이 되면 또 달라지겠지 - 출판사 이곳저곳에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다 지역의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만나러 갔었다.
부산의 중앙동에 있는 작은 출판사였는데, 작은 사무실에 들어가자 꽂혀 있는 책들의 면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야, 이 정도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결론적으로, 어떤 인간인지 보고 싶었다는 출판사 사장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것으로 미팅을 마무리하고 나오는 길에, 읽고 싶은 책이 많네요, 하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그냥 꽂아둔 책이 대부분입니다.”하고 말했다.
내 책꽂이는 읽은 책과 읽을 책의 투쟁의 장이다. 미래에 당도할 읽고 싶은 책들의 무리, 그 무리의 예고된 엄습은 그 양자의 공통된 두려움이리라. 저자가 얘기한 것처럼, 난 책을 통해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 갱신될 미래의 나까지 만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과 예측, 회상과 전망, 그 교차로에서 분주히 오가고 있다.
SNS를 통해 지역에서 작은 서점, 독립 서점을 하는 이들, 그들의 그 서점의 일상을 엿보게 된다. 돈 버는 재주가 없는 사람 입장에서 할 걱정은 아니다만, 괜스레 그들의 수입을 걱정하게 된다. 다들 책을 팔아 밥을 먹고 사는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책 속, 저자가 인용한 일본 곳곳의 서점들의 사례를 보니 수입과 생계가 절대적 이유는 아닌 듯하다. 그런 서점들의 존재 이유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다.
부산에서 살게 되면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줄었고 독서 모임은 물론이고 대학에서의 강의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둔 후로는 읽고 공부한 것을 나누는 것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 내가 관심을 거둬들인 그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내고 서점을 차리고 사람을 불러 모으고 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이 “책 세상”은 사라지지 않고 버티는 듯하고.
동네의 작은 서점, 작은 도서관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토끼 구멍 같은 곳이리라. 호기심에 슬쩍 발을 들여놨을 뿐인데 부지불식간에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 스윽 하고 빠져들게 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러니 다들, 다시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마녀와 마법사의 역할을 곳곳에서 해주시라. 사서와 서점 주인장의 가면을 쓰고 책이라는 위대하고 장엄하며 신비한 세계로 세상의 모든 풋내기들을 안내해 주시라. 이 책은 그 모든 마녀와 마법사를 위한 헌사이자 축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