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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퀑탱 메이야수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7

by 최영훈

낯선 이름, 낯선 이론

지바 마사야의 <현대사상입문>에는 낯선 학자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말이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다. 이름 참. 앞이 이름이고 뒤가 성이라고 보면, 둘 다 무난하진 않다. 그나마 이름은 영어식으로 읽으면 무난한 편인데, 쿠엔틴이기 때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그 쿠엔틴 말이다. 스펠링도 같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하간, 이와 그 무리들의 핵심 키워드는 그 유명한 사변적 실재론인데, 이거에 대해선 나중엔 얘기하자. 어찌 됐든, 내가 좋아하는 지바 마사야가 한 챕터를 할애하여 언급한 학자와 그 일당들이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자주 가던 서점에서 이 책이 눈에 들어왔고, 아주 순진하게도 ‘오, 이 양반 대중문화에도 관심이 있나 보지.’하는 생각에 덥석 집어 들었다. 물론 그 얇은 두께에도 끌렸고.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었다.


경험론과 이성과 당구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사전 지식과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식과 관련해서는 세 인물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필요하다. 흄, 포퍼, 그리고 칸트다. 전제는 SF에 대한 정의다. 우선 전자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보자. 흄의 화두를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했는가? 경험의 범주에 들지 않는 뭔가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에 다가간 것일 뿐이지 않나?”, 자, 이게 대충, 경험론이다.


그러면서 저자가 흄의 책에서 들고 나온 예가 바로 당구의 경우의 수다. 게임 중이든, 예술구든 당구대 안에서 일어나는 큐대와 당구공이 펼치는 경우의 수는 평면 위에서 선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움직임은 당연히 힘과 충격에 의해 결정되고 말이다. 난 당구의 문외한이지만 가끔 당구 경기를 보곤 하는데, 그때, 그래픽으로 다음 공의 궤적을 직선으로 그려주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가능한 경우의 수 1이다. 그 경우 1, 케이스 1은 그 상황의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손쉬운 수이지 유일한 수는 아니다. 천재적인 누군가 나온다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가 나올 수도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선수라면 당연히 모든 가능한 수를 생각해 본 뒤에 그 수를 선택할 것이다. 그 경우의 수의 모든 것을 메이샤누는 총람, 쉽게 말하면 레퍼토리의 총합을 만드는 행위(répertoriées), 그 자체를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 파악 가능한 대상들의 목록을 빠짐없이 작성하는”, 그 무지막지한 행위를.


그러나 흄은 그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당구공이 공중에 떴다가 알 수 없는 궤적으로 날아다니다가 따다닥, 충돌한 후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반문에 누구도 쉽사리 “응,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 목록의 총람을 완벽하게 작성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반문에, 저자는 포퍼와 칸트를 통해 답을 한다.

자,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포퍼는 그 유명한 반증가능성으로 답한다. 토마스 쿤이 말한 정상 과학의 조건으로 말이다. 그래서 포퍼라면 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공중으로 당구공에 치솟았다가 공중 3회전으로 한 다음에 S자를 그리면 춤을 춘 다음에 따다닥 할 수도 있어.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합의한 당구공의 움직임은 평면 위에서의 그것으로 합의를 봤어. 이게 일단은 정상이야. 다시 말하지만 물론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 만약 그 움직임이 반복되고, 그 반복의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면 우리가 그것도 받아들여줄 게, 그때까지 그 가능성은 그냥 가능성일 뿐이야. 예외적인 사건인거지.”


반면 칸트의 대답은 이렇다. “세계는 이성의 인식으로 존재하잖아. 우리가 이제까지 봐왔던 당구공의 움직임은 이성으로 인식한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규칙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우리가 당구공의 움직임으로 인지했던 거야. 만약 그 이성의 인지적 범위를 넘어서는 움직임이 발생한다면 우릴 그걸 인지할 수도 없어. 왜냐하면 그땐 이미 이 세상도 인지 범위를 넘어섰을 거기 때문이다. 그건 세계 밖의 사건이자, 탈세계적 사건이기 때문이지. 인지 불가능한 사건은, 그래서 이성적으로 설명되고 해석되지 못하는 사건은 사건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거지.”


뭐, 엄청나게 다른 대답 같지만, 사실은 절대적인 근원, 인식의 근원과 틀을 전제하고 있다. 경험주의에 대한 현상학적 대답이라고나 할까? 저자는 이 대답을 바탕으로 제목에 나온 과학 소설과 과학 밖 소설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과학 소설은, 간단히 말하면, 어떤 세상을 배경으로 하든,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하든 어떤 현상과 사건에 대해 독자에게 그럴듯하게 설명을 하면 그건 과학 소설이다. 그야말로 Science Fiction인 것이다. 반면 설명 없이, 근거도 없이,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이 사건이 계속 나열 대며 “펑”, “펑”, “펑” 터지면 “과학 밖 소설”이다. 그야말로 세계관도 각주도 없는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과 과학 밖 소설

자, 이쯤 해서 우린 궁금하다. 아니 그 과학 밖 소설에 대한 생각이 뭔 의미가 있는 건 지 말이다. 우선 지바 마사야의 글을 통해 이 일당의 주장을 요약해 보고, 그다음 메이야수의 주장을 이어 보자. 지바 마사야는 <현대사상입문>에서 사변적 실재론을 “인간에 의한 의미 부여와는 관계없이, 그저 단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 쪽으로 향하는”, “의미보다는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을 문제 삼는 신종 실재론”으로 요약했다. 여기에 그가 요약한 메이야수의 주장을 덧붙이면 조금 더 윤곽이 선명해진다.


메이야수의 관심사는 “인간의 해석에 좌우되지 않는 그저 단적으로 동일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로서의 실재”다. 그래서 메이야수는 “그 의미를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전혀 무관하게 그저 그렇게 있는 존재”, 인간의 의미이해와의 관계에서 “잔혹하게 분리된 단적인 존재”를 말하려 한다.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우연적”이고, “절대적 실재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우연적이며, 그렇다면 그대로의 모습으로 계속 존재할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 “단적인 실재는 그저 우연일 뿐 언제든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할지도 모른다.”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바 마사야의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가장 철저한 “차이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럼, 그런 세계는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당연히 소설 속에서는 가능하다. 메이야수는 실제로 책에서 그런 소설의 예를 든다. 대재난이 일어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재난의 원인을 찾거나 다시 문명의 재건을 위해 안전한 장소를 대피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대신, 관련한 사건들이 연이어지는 그런 소설들을 말이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상상이다.


하지만 시사성은 있다. 모든 것에 답을 찾기 위해 서성이는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건들이 있는 건 아닐까. 욕망이나 충동이 반영된 사건에 그럴듯한 이성적 원인을 제시하여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해 너머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나 스스로 폐제(廢除)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반성까지. 그런 면에서 메이야수의 이 책은 과학소설이 공상과학소설은 과학소설이고, 진정으로 우리가 삶으로 써나가야 할 진정한 “공상과학소설”, 과학 밖, 세계 밖의 소설은 써지지 않았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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