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22
어디선가 들은 얘기인지, 농담인지 기억은 안 납니다. 내 장례식에 누가 올 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어차피 죽은 뒤의 일은 산 사람의 몫이고 휑한 장례식장의 풍경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도 산 사람의 몫이니 죽음을 생각할 때는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죠. 인생의 의미 하나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혼자 와서 죽을 때도 혼자인 것이 사람이니까요.
사실 전 혼자 있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솔직히 편하죠. 중학교 졸업 이후 여러 사정이 있어 혼자 산 세월이 길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기숙사 생활을 한 덕분에 가족과 떨어져 지냈습니다. 석사 공부할 때는 오히려 집에서 통학을 했지만, 그 이후 어머니가 미국에 들어가시는 바람에 아내 하나 보고 부산에 내려와서 혼자 살았습니다. 결혼할 때까지 말이죠. 덕분에 뭐든 혼자 잘 해결합니다. 혼자 밥 먹는 것도, 공부와 운동도, 틈새 시간을 보내는 것도.
물론 광고/홍보 일을 하면서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며 하는 일이다 보니 저 같은 사람도 사회화가 될 수밖에 없죠. 또 결혼생활을 하면서, 특히 은채가 태어난 이후엔 저 역시 딸바보가 되어서 혼자 있는 시간보다 딸과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전전긍긍해하지도 않고 외로움을 타지도 않습니다. 마침 지금 하는 운동인 수영도 어찌 보면 전형적인 개인 종목인 운동이라 이렇게 열심히, 질리지 않고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전 은채가 저처럼 크지 않길 바랐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되는 걸 극도로 경계했죠. 다행히 은채는 어린이집 시절부터 친구와의 관계가 좋았고 학교에 가서는 제법 리더십을 발휘해서 친구들이 따르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친구들한테 모든 걸 맞춰주려고 하는 경향이, 친구들과 더 어울리고 싶어 하고 무리를 지어 다니고 싶어 하는 욕심이 생기는 걸 보게 됐습니다. 혹시나 어떤 특정 무리에 끼지 못하거나, 혹은 소속된 무리에서 버림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하는 걸 보게 됐습니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전 은채한테 단호하게 말해줬습니다. “개는 늑대의 생각을 모른다. 늑대는 개가 될 수 있지만 개는 늑대가 될 수 없다.”, 그 뒤로도, 딸이 친구들에게 휩쓸릴 때마다, 저는 이 말을 종종 해줬습니다.
그 말을 처음 해줬을 때, 추가적인 설명을 해줬습니다. “목표가 다른 사람은, 꿈이 크고 이상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다. 너는 이미 법조인이라는 꿈을 가진 사람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꿈이 없고 목표가 없는 아이들에게 너를 맞출 필요도 없고, 그런 아이들에게 너를 이해시키려 애쓸 필요도 없다. 너를 질투하지 않은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하면서 너의 곁에 머물 것이고 너를 질투하고 시샘하는 아이들은 너를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러니 모든 아이들과 친해지려 애쓰지도 말고 그럴 필요도 없다. 겉으론 비슷해 보여도 개와 늑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정진이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精進, 正眞, 挺進, 이렇게 세 개죠. 앞선 두 개는 불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전자의 정진엔 “힘써 나아감”이라는 뜻을 앞에 두고 그 뒤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가다듬는다.”는 뜻이 따르죠. 더 불교적인 뜻을 추가하면 “한마음으로 도를 닦는다.”는 의미가 추가됩니다. 후자의 정진은 바르고 참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정신은 “여럿 중에서 앞서 나간다.”는 뜻을 갖고 있죠.
이 중 첫 번째와 세 번째에 쓰인 한자를 더 깊이 음미해봐야 합니다. 진(進)에 담긴 의미를요. 한자는 상형문자이니 글자를 뜯어보면 사물이나 생물, 자연의 모습을 하고 있죠. 또는 두 개의 모양을 합쳐 제3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추(隹) 자에 쉬엄쉬엄 갈 착(辶) 자가 합쳐진 글자인, 앞으로 나아간다는 진(進) 자는 앞으로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진자에는 단순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후퇴 없이 뒷걸음질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죠. 날아가는 새에게는 후진이 없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공부에 정진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면 상당히 비장하게 됩니다. ‘공부에 정진한다.’라고 쓰고 말하면 공부의 의미는 도를 찾는 수련의 의미까지 상승됩니다. 알다시피 공부는 특정한 기술, 기예를 닦는 사람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냥 공부를 하는 것과 공부에 정진하는 것은 그 행위의 밀도와 집중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행위가 됩니다. 정진하는 공부는 그야말로 스님들이 하시는 하안거, 동안거처럼 외부와 격리된 나만의 화두를 찾는 시간, 더 나아가 이를 위해 세상을 등지고 벽만을 바라본 채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는 것과 동격이 되기 때문이죠.
이런 이유로, 제대로 하는 공부는 외롭습니다. 함께 동문수학하는 이가 있어도 그 고충을 나눌 수 있을 뿐 공부 그 자체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공부를 하기 전에 가져야 될 마음가짐 하나는 외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외로울 것이라는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을 말이죠. 더 나아가 공부는 결국, 혼자서 해나갈 수밖에 없는 과업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겠죠. 부모와 형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그저 물질적인 후원과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그 정도 뿐이라는 것을.
물론 공부를 벗어나면 혼자가 아닙니다. 스님에게도 형제, 자매가 있고 벗이 있으며 선후배가 있습니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뜻을 헤아리고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대한 화두를 이해하기 위해 인생을 던진 사람에게도 이렇듯 세상과의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속의 공부를 하는 학생과 학자는 그 인연이 더 많고 복잡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스님과 신부님, 수녀님들이 그러하듯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이상과 신념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나와 다른 신념으로 인해 오히려 내 신념을 꺾으려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 상식으로 타자의 꿈과 이상을 불가능의 범주로 끌어내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하는 공부라면 더욱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만의 시간,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더 나아가 그 시간을 기꺼이 반겨야만 하는 이유는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담담히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혼자만의 시간을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돕는 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이 형성된 아이는 친구들과 시끌벅적 놀다가도, 하굣길에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며 걷더라도 집에 와서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 시간을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자신을 위해 정진하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물론 그 시간에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혼자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달리기를 할 때도 있고 산책을 할 때도 있으며 가끔은 말수가 적은 아빠가 동행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 방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도 아니면 그저 이런저런 잡다한 걸 하면서 푹 쉴 때도 있죠. 그러다 스스로, 혼자 있는 자신을 다독이며 공부방으로 안내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혼자 책상에 앉아 묵묵히 공부를 할 때도 있죠. 무엇을 하든, 저는 상관없다고 봅니다. 외로운 공부를 묵묵히 해낼 수 있는 힘 중 하나는 궁극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서 온다고 믿기에 혼자만의 시간을 기꺼이 반기는 그 자세야말로 공부의 기본자세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은채는 유연해졌습니다. 혼자만의 시간과 친구들과 있는 시간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게 됐죠. 또 학우와 학원 친구, 친구 등 같은 또래 친구라 하더라도 관계의 성격에 따라 그 물리적, 심리적 거리도 능숙하게 조절하게 됐습니다.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도 갖지만 엄마와 아빠와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 어른이 되기 전에 갖춰야 될 능력이라면 능력이죠.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인간관계의 일정 부분은 가까운 사람과의 그 거리감 조절, 시간 할당의 문제에서 발생하지 않나요? 연인이라면 무조건 이십사 시간 연락이 가능해야 하고, 언제든 보고 싶으면 봐야 하고, 일과 학업보다 사랑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른이 되는 것도, 우정과 사랑의 감정적 조율이 힘든 것도, 결혼한 뒤 본가와의 관계 재정립을 못해서 결혼 생활에 위기를 불러오는 것도 어찌 보면 어른이 되기 전, 나와 세상, 나와 타자 간의 절묘한 균형 감각을 형성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멘털이 강하다는 건 결국 이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나와의 간격과 관계의 조절, 타자와 나와의 거리와 관계의 조절, 그 조절을 얼마나 냉정하고 차분하게 하느냐, 이것이 관건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추석 연휴, 은채는 엄마와 단 둘이 놀이공원에 갔었고, 하루는 소꿉친구인 지유와 서면에서 쇼핑을 했습니다. 또 하루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드라마를 보기도 했죠.
그러는 동안 어떤 날은 맨 얼굴로 있었지만 어떤 날은 이제 막 엄마한테 배우기 시작한 메이크 업 기술을 발휘해 연하게 화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혼자 있는 시간과 사회와 마주하는 시간을 구분하여 자기 자신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 아닐까요? 이를 통해 은채는 더 넓은 세상에서도 자기 자신을 능수능란하게 조율하면서 살아나가지 않을까요? 그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더 길게 할 것을 약속드리며 이번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