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23
하루에 두 번 안아줍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아침에 일어났을 땐 딸이 제게 걸어옵니다. 거실에 앉아 온수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 저를 향해 걸어오죠. 제가 보기엔 “삐쩍” 말라 보이는 소녀가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잠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옵니다. 전 일어나서 딸을 안아주며 엉덩이를 두 번 정도 토닥거려 줍니다. 그 뒤, 딸은 거실 한가운데에서 요가 매트 위에 누워 허리를 풀고 있는 엄마 옆에 누워 엄마에게 폭 안깁니다. 이미 엄마보다 훌쩍 크지만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엄마에게 폭 안깁니다.
자기 전에는 제가 다가가 안아줍니다. 딸 방에 수건을 적셔 널어준 뒤, 딸이 자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누우면 취침등을 약하게 켠 뒤 누워 있는 딸에게 다가가 꼭 안아줍니다. 안고 있으면 제 마음에 있던 뭔가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납니다. 유독 힘들었거나 신경을 많이 썼던 하루를 보낸 뒤에 맞은 밤에는 더 오래 안아주는 이유입니다. 안은 채 볼에 두세 번의 뽀뽀를 합니다. 그 뒤 “잘 자.”하고 말해준 뒤 방문을 닫고 나옵니다. 돌아서는 제 뒤에 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딸이 혼자 잘 때부터 이랬는지, 아니면 인테리어 공사가 끝난 뒤 딸의 방의 위치를 바꿔준 뒤부터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기 때부터가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십 대가 된 이후부터 잠들기 전과 일어난 후에 안아주기 시작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자, 이제부터 하루에 두 번 안겨야 한다.”하고 합의를 한 건 아닙니다. 딸도, 저도, 그리고 아내도 모르는 새 그렇게 되어 버린 거죠. 솔직히 말하면 한 달에 한 번도 아내와 포옹을 안 하는 제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기는 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갑게 누군가를 대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이상하게 딸을 안아주는 것도, 또 딸이 제게 안기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미국 사람들이 포옹과 키스를 밥 먹듯이 자주 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루 두 번, 딱 정해진 건 아닙니다. 딸은 종종 안아달라고 합니다. 공부를 하다 공부방에 나와서 안아달라고 합니다. 자기 방에서 실컷 태블릿 PC로 드라마를 보거나 동영상을 보다가 나와서도, 책을 보다가 나와서도 안아달라고 합니다. 이유도 없고 때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안기고 싶을 때 엄마와 아빠 중 보이는 사람에게 안아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안아줍니다. 전 지금 “안아줍니다.”라는 문장을 쓴 뒤 약간 울컥했습니다. 안아달라고 할 때마다 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지, 새삼 그 무게와 의미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는 건 힘듭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던 어떤 철학을 신봉하든 이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종교도, 철학도, 심지어 타로와 운세가 존재하는 겁니다. 사는 게 마냥 쉬웠다면 아마 그리스 신화도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인류가 현실을 마주한 그 순간부터 삶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이성적인 존재,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저 모든 걸 창작해 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는 게 만만 했다면 앞서 말한 모든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사랑도, 가족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도 우정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삶은 혼자서 헤쳐 나가기 버거운, 일 인분 이상의 고통을 선사하기에 우리는 타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듯이 인류의 공동체는 씨족사회와 부족사회를 거쳐 국가로 나아갔습니다. 어울려 살고 모여 살고 서로 살을 부대끼며 살았던 건, 다시 말하지만 혼자선 이 삶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머리에 든 걸 제외하면 생태계에서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자연환경조차 견디기 힘든 존재였으니까요. 아마 우리가 이렇게 연약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문명도 발전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음만 먹으면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요즘도 여전히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얼마 전, 딸과 함께 재미있게 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본방 사수를 하며 본 프로그램이죠. 바로 유명 연예인의 자제들이 나와 데이트를 하는 <내 새끼의 연애>입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배우와 가수, 요리사의 자녀들이 남녀 동수로 나와 며칠간 속초의 한 숙소에 머물며 다양한 경험과 데이트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확인해 나가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내용입니다. 전 딸과 그 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안유성 명장의 아들인 안선준 군의 사랑을 응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녀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안선준 군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죠.
전 딸과 함께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출연한 청년들이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녀들의 지난한 연애 과정을 지켜보면서 부모들은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자식이 용감하게 마음을 전하면 기특하게 여겼고 그 마음이 제대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면 함께 기뻐했습니다. 표현의 방법만 달랐을 뿐 다들 자녀의 마음 변화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지켜보는 것을 보며 저도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마 평생 다시없을 경험일 것입니다. 중학생만 돼도 참관 수업은 없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의 학교생활을 들여다볼 기회는 없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아이의 직장생활을 볼 기회도 없습니다. 연애도 마찬가지죠. 자식이 누가 하나를 소개해 줘야, 그제야 부모는 얼굴을 볼 수 있죠. 그러니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성인이 된 자식이 처음 보는 이성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데이트를 하고 심지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다는 건 정말 두 번 다시없을 소중한 기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내 곁에 머무는 것도, 내가 자녀 곁에 머무는 것도 결코 당연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에 힘을 얻는 것도, 자식의 무한한 믿음과 사랑에 부모가 삶의 힘을 얻는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며 결함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 유한성과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사랑을 발명했고 신을 발명했으며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이 만만치 않은 인생을 그래도 견디며 살아내긴 위해선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아이는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등 뒤에서 붙잡는 침대의 유혹을 이겨내고 일어나 밥을 먹고 등교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갑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수업을 듣고 정해진 시간 동안 쉬고, 또 밥을 먹습니다. 학교에서 가라고 할 때까지 학교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 모든 과정엔 나름의 수고와 인내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아이들은 바로 학원 차에 올라탑니다. 이 학원 저 학원,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하루에 학원을 딱 하나 밖에 안 가는 은채도 집에 오면 여덟 시가 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게 당연합니다. 이 어린 나이에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때, 아이가 힘을 내어 이 모든 걸 해내는 힘은, 그 힘의 근본적인 원천은, 저는 가족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문맹이 흔했던, 학력이 짧은 것을 당연시했던 우리 조부모님 세대의 얘기를 했었습니다. 자식만은 더 공부를 시켜 넓은 세상에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일을 했던 그분들 덕분에 우리 부모님 세대와 저희 세대가 고등학교와 대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고 고향을 떠나 그야말로 대처에 나가 살 수 있게 됐죠. 당시의 문해력은 그야말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간 자식과 고향에 남아 있는 부모는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나름의 삶을 헤쳐 나갔습니다. 대처에 나갔던 자식들은 명절이 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고향집에 돌아왔죠. 그 이유는 뭘까요? 가족이 살아갈 힘이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받아들이는 이유이고 경쟁에서 물러서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들 또한 힘닿는 데까지 농사를 짓고 산을 오르고 바다에 나가 일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자식이 더 큰 일을 도모할 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자식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하려 할 때 받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그렇게 믿고 있고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보통의 부모라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힘은 자신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힘에 있습니다. 전 솔직히 아내와 딸에게 말하곤 합니다. 두 사람이 없으면 특별히 더 살아야 될 이유도, 살아 있어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요.
제가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둔 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강제로 은퇴를 당한 뒤 새로운 일에 최대한 빨리 뛰어든 것도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빠가 일을, 그것도 아빠가 좋아하는 독서와 글쓰기를 특기로 하는 일을 아주 즐겁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아이에게 안정감과 심리적 편안함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된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기준은 자식입니다. 저같이 이기적인 사람도 그렇데 되더군요. 맛있는 걸 봐도 딸이 먼저 생각나고 제 옷을 사러 가서 딸 옷만 사 올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식이 행복한 걸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나에 행복이 타인에게 달린 경우는 없습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론 아이의 행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행복도 중요하죠. 아니, 어쩌면 지금 행복한 아이가 미래에도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행복하게 공부하는 아이가 미래에도 행복하게 공부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딸은 행복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할까요? 간절히 바라건대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떤 바람도 이 두 가지 바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자녀들도 그러길 바랍니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