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ro Feb 29. 2024

네덜란드 직장인 생존일기 - 자기 어필 편

묵묵히 소처럼 일하면 소취급 당할 수밖에

우리 아빠는 한국에서 트럭운전사로 거의 20년을 일하고 계신다. 그전에는 학원 봉고차 기사로 몇 년을 일하셨고 그전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에는 자그마한 슈퍼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였으며, 그전에는 서울의 작은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을 하셨다.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부모님을 둘 다 여의는 불행이 닥치셨지만 그보다도 당시 어린 동생들에게 주어진 '고아'라는 낙인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고자 무작정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 아빤 2023년에 환갑을 맞이하시고 지금까지도 계속 일만 하며 살아오셨다. 일일일 일이 뭔지 나는 아빠만 떠올리면 매일이면 새벽 5시에 떠오르는 해와 함께 집을 나서시는 모습, 그리고 해 질 녘 저녁을 반주와 함께 하신 뒤 저녁 10시도 되기 전에 잠에 드시는 모습만 떠오른다. 유일한 낙이라고는 티브이에서 틀어주는 트로트 경연대회나 가끔 보시는 축구경기정도랄까. 


그렇게 묵묵히 일만 하며 살아오신 아빠를 보며 자란 나도 자연스럽게 '성실함'의 가치를 뼈에 새기게 되었다. 주어진일만 뭐든지 열심히, 묵묵히, 성실하고 착실하게만 하면 그 대가는 당연히 따라오리라는 믿음과 함께. 




내 생의 첫 직장은 바로 카페알바였다. 수능 바로 직전 한겨울에도 마감인 날에는 막차시간 이후까지도 일을 하고 어두운 찬바람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참 열심히도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잡무가 많았던 알바였는데, 책임감의 무게가 낯설기도 했지만 처음 벌어보는 유니폼과 착착 입금되는 돈에 어른이 되었다는 설렘이 더 컸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왜 이리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을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좋을 게 하나도 없다.


호텔 1층에 딸려있던 프랜차이즈 카페였던 그곳은 매일 아침 좁은 뒤편 주방에서 브루스타를 비롯한 협소한 장비로 어떻게든 조식뷔페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고작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나는 아침 6시에도 출근하여 함께 일하던 이모님과 함께 양상추와 사과 등을 손질하곤 했다. 찬물에 부르튼 손으로 나는 그때 어떻게 하면 당근을 손쉽게 채 썰 수 있는지 배웠다. 주방 이모는 어쩜 어린 학생이 손이 이렇게 야무지고 성실하냐며 칭찬해 주셨다. 사실 그냥 일을 시키는 게 미안해서 하시는 말씀이었을지도 모르지만 18살이었던 내겐 묵묵하고 "철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심취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난 첫 알바를 수개월동안 마친 뒤 모은 돈으로 호주로 떠나게 되었고, 이 작은 경험 덕에 호주에서도 카페알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을 하며 나와 함께 배정이 되면 좋아하는 동료 직원들, 나만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사장님이며 시즌마다 가장 바쁜 크리스마스 등에도 마치 든든한 히든카드처럼 최전방에 배치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찌나 뿌듯했던지. 아참, 시급은 남들과 똑같이 받았다. 하지만 고작(이 아닌데!!) 5달러보다는 '나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라는 게 훨씬 더 좋았다. 마치 나를 꼭 필요해하고, 내가 정말 귀중하구나!라는 가치를 인정받는 듯했다. 




이런 식의 여러 알바자리와 직업을 거쳐가면서도 나는 늘 일머리가 좋고 싹싹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졸업 후 정규직으로 취직이 된 후에도 나는 업무평가에서 성실하다는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이 업무평가에서 빠진 건 "월급 인상" 혹은 "승진" 등의 코멘트. 성실하게 일만 하면 자연스레 따라올 줄 알았던 기회는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딱 2년이 되던 날이 껴있던 주, 업무평가 보고서를 읽은 뒤 퇴근하는 운전길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성실하다는 코멘트들은 인정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호주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아, 내가 아무리 묵묵히 일해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구나!


그다음 주부터 나는 곧바로 나만의 PDP (Personal Development Plan)을 구성하여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같이 하는 업무들을 줄글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표를 만들어서 수치화시키고 구체화시켰다. 2주 간격으로 나누어 그 동안 얼마큼 (%)의 발전을 이끌어냈으며 이 발전이 마이너스일 경우에는 어떠한 액션과 서포트가 누구에게서부터 왜 어떻게 필요한지를 썼다. 


처음엔 마치 내가 내 자랑을 하는 것만 같아서 좀 부끄럽기도 했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법이라서 많이 어려웠다. 내가 종사하는 영업직의 특성상 대부분의 업무가 통화나 문자 같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데다가 어느 주간동안은 어느 성과도 내지 못한 날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간에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하다보니 요령이 생기고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한 달 이렇게 2주 간격으로 작성한 2장의 PDP를 직속 상사에게만 이메일로 첨부하여 보냈다. 이메일 내용은 부장님도 본인 업무로 바쁘실 텐데 내가 무슨 매일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런 식으로 받아보시면 좋을 것 같고, 이런 형식으로 매달 보내드릴 예정이라는 식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5분도 되지 않아서 회신이 왔다. "너무 좋은 방법이야, 모두가 너처럼만 해준다면 내 일이 정말 더 쉬워질 텐데! MT (Management Team)과 공유하도록 할게". 그의 회신은 나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줬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기회를 6개월 만에 제공하는 길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 나는 이제 2.5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작년 10월에는 월급 인상과 함께 승진이 되어 내가 맡는 고객사가 늘어났고 출장이나 외근의 기회도 더 많이 주어져서 발로 뛰는 직원이 되었다. 그전에는 세일을 이뤄내기 전에 밑작업을 해주는 보조역할이었다면 이제 나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일에서 벗어난 주제에 대한 대화를 하고, 우리 회사를 판매하는 게 아닌 나를 내세워서 두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앰버서더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잦은 출장과 외근에 지치기도 하지만 모니터 뒤에서 주 40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비행기를 타며 20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내 적성에 맞다. 나는 아직도 2주에 한 번씩 PDP를 작성하는 중이고, 나의 PDP가 주기적으로 MT에게도 공유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이 PDP에 절대로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봤자 꼬리가 길면 잡히기 때문에 시스템에서 나의 실적은 금방 확인이 되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직접 시스템에 접속하여 나의 이름을 검색하고 실적을 확인하는 일은 거의 없을 거고, 그럴수록 나는 더 자기 어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하루하루 점점 더 성실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는 사원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6개월을 돌아보니 앞으로의 6개월은 또 어떻게 형성되어 갈지 궁금하다. 




한국인들은 겸손함을 미덕으로 여기기에 이 "자기 어필"이 자칫하면 잘난척하고 재수 없어 보일 수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우리 부모님 세대는 더 그랬을 테고,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1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한국 미디어를 계속 접하긴 하는데, 내가 떠난 10년 전에 비하면 요즘은 또 자기 어필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들 한다. 사회생활을 해보니 이 자기 어필이라는 것도 객관적인 증거나 뒷받침이 없으면 허언증으로 비웃음을 사기가 쉽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럴수록 내가 어떻게 정말 말 그대로 어필이 될 수 있을지 자기 자신의 강점, 그리고 이를 어떻게 구체화하여 남들의 눈에도 강점처럼 보이는 방법들을 잘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다. 


작가의 이전글 유럽식당에서 인종차별(?) 피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