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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촌부가 된 최선생 Feb 04. 2023

미선로 교동길에서 27

참깨묶기


온종일 갈근비가 쏟아지던 장마가 끝나고 먼 산에 구름 꽃이 피어납니다.

산허리까지 내려온 구름은 마치 용암에서 수증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형상입니다. 하강의 이미지와는 또 다르게 상승의 이미지는 가슴의 자맥질로 이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을 보니 육순의 나이란 아직 청춘인가 봅니다.     


세상은 모처럼 눈부시게 그 자태를 드러내는데 마을의 상수도가 막혀 물이 나오지 않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수재민의 고통에 비하면 그건 비할 바도 아니지만 당장 물이 안 나오니 여러모로 불편했습니다. 내년 여름이 되어야 광역 상수도가 연결된다고 하니 가끔은 이렇게 불편을 감수해야 하나 봅니다.    

 

비가 개면 못한 농사일을 하려고 했지만 땀 흘리고 나서의 샤워가 마땅치 않아 그냥 쉬기로 했습니다. 나는 이참에 고마운 이웃들에게 제가 쓴 책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농사일이 바쁘신 이웃들이 제 책을 관심 있게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인사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고 행여 읽어주신다면 감사한 일이겠지요. 나는 이장님에게 드리기 위해 이장님 댁을 향했습니다. 그 길은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길을 잘못 들어섰습니다. 그것이 작렬하는 태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갈림길에서 무조건 직진하는 평소의 내 버릇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도 20분 이상을 내리 걸었습니다. 이장님 댁은 10분이면 도착하는데 말입니다. 뒤늦게 길을 잘못 들어선 걸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그 길은 갈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물은 찔끔찔끔 나옵니다. 우리는 농사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어 참깨를 베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태풍 때 참깨가 죄다 쓰러졌는데, 세우면 안 된다고 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지요. 참깨는 엎어진 채로도 잘 자란다고 하네요. 어쨌든 오늘은 참깨를 잘라 볏단처럼 묶어 두려고 합니다. 아내는 낫으로 밑둥을 잘랐고 나는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전지가위로 잘랐습니다. 의외로 전지가위의 효율성이 좋았습니다. 노마드 철학자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배치(아장스망)에 의해 전지가위는 낫 기계로 변용되었습니다. 엉뚱한 터치는 의외의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우리는 참깨 묶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의 할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샤워를  해야 하는데 아직도 물이 안 나와 고민이 되었습니다. 나는 뚝뚝 떨어지는 물을 컵에 받아 가슴에 뿌리는 방식으로 샤워했습니다. 그래도 일하고 나서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늘 부족함 없이 쓰던 물이 결핍되자 소중함이 새삼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결핍을 경험해야 소중한 것과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나 봅니다.     

자정 무렵 밤하늘에 흰 구름이 환하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달빛도 아니고 구름 빛으로 세상이 환하다니 기이했습니다. 낮게 떠오른 북두칠성도 환한 세상이 수줍은지 제빛을 감춘 채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어쩌자고 구름은 자신의 하얀 빛을 밤늦도록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 날 미션은 참깨 묶기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참깨를 묶어 세워 본 적이 없어서 고개만 갸우뚱거립니다. 결국 참깨를 가지런히 세워둔 이웃집을 탐방했습니다. 우리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참깨 묶는 법을 물어보았습니다. 

“아저씨, 참깨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네요. 우리도 참깨를 묶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네 다발을 모아 두 개씩 마주 보게 하면 되지요”

오호~ 네 다발을 묶어 서로 기대게 세워 놓는 것이었습니다. 설명까지 들었으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주차장 한쪽 구석에 참깨를 세워 놓을 요량이었는데 막상 하려니 그게 또 만만치 않습니다. 마침 고추 농사를 지으러 오신 할머니가 지나가길래 부탁을 드렸더니 시범을 보여줍니다. 할머니 방식은 세 다발 묶기입니다. 나는 할머니 방식으로도 해보고 이웃집 방식으로도 해봅니다. 시범대로 따라 했더니 엉성하나마 참깨가 세워집니다. 두 다발 방식으로는 참깨가 세워질 수 없다는 엄정한 사실도 확인합니다. 사람 인(人)자는 둘이 기대어 선 형상인데, 참깨와 달리 인간은 둘이 있어도 서로 기대어 설 수 있습니다. 둘이 기대어도 옆으로 쓰러지지 않는 까닭은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를 잡아주기 때문이겠죠. 사람이 참깨보다 위대함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농사의 매력은 새벽일을 마치고 나서 샤워를 한 후 먹는 아침밥에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었던, 농부 아침밥의 마법입니다. 누룽지 밥에 김치와 오징어젓갈과 고추가 전부였지만 그렇게 꿀맛일 수 없습니다.

후식으로 올드 팝송을 들으며 먼 산 바람꽃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도 그렇게 우아할 수 없습니다. 캠핑용 의자에 135도 각도로 누워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흘러가는 바람꽃을 바라보는 일은 매일의 일상이지만 날마다 다른 기쁨입니다. 단조로워 보일 것 같은 이곳도 매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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