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옆 미술관 간음한 여인을 읽고
피터르 드 호흐(Pieter de Hooch)가 그린 <술 마시는 여인>이다.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평범한 여인은 이미 취해 얼굴이 붉지만 남자는 술을 다시 따라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뒤의 여인이 애원하는 듯 그만하라는 시선을 보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술 마시는 여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얼굴을 가릴 듯한 큰 모자를 쓰고 곰방대를 입에 넣고 여유롭게 이 장면을 바라본다. 뒤이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이 그림의 해석은 그림 뒤에 있는 액자 속 그림을 보아야만 정확한 화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액자 속 그림은 성경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 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다.
군중들은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위협하듯 질문을 한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시험해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덫이다.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사랑하라고 권하던 자신의 말이 헛된 것이 되고 용서하라고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진퇴양난이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땅에 글을 쓰신다.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린 채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요 8:6-8)
술 마시는 여인 그림 속 뒤에 걸린 액자는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시는 장면이다. 피터르 호흐는 이 액자 그림을 통해 간음 현장이 왜 만들어졌는지 고발하고 있다. 여성은 누군가가 쳐 놓은 덫에 걸렸다. 간음하던 현장의 남자는 사라졌다. 여인만 붙들려와 돌에 맞을 운명에 처했다.
또 다른 그림을 보자.
렘브란트 <그리스도, 그리고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그림이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가장 환한 빛을 여인과 예수님의 얼굴 그리고 옆에 여인을 고발하는 자의 손 뒷면에 앉은 대제사장(교회 옆 미술관의 저자는 가톨릭에 대한 저항으로 본다) 같은 이를 비춘다.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그림에 넣었다. 그것도 2층 구조로 그림 속에 진짜 이 일이 누구에 의해 꾸며졌는지 소상히 밝힌다. 하지만 화가의 시선은 정죄나 고발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림 속 화가인 렘브란트의 시각이 따스하다. 죄인인 여인은 무릎을 꿇고 있다. 죵교 지도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간음의 현장범인 여자를 데리고 왔다. 렘브란트는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던 종교 지도자 즉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있던 유대인 대제사장 세력임을 그림 속에서 밝힌다.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정치와 권력 그리고 금권의 중심에 섰던 종교지도자 그리고 간음하던 여인을 한 그림 속에 배치했다. 간음하던 여인은 그들의 덫에 걸린 한 마리 어린양임을 렘브란트는 한 장의 그림에 모아 실체를 보여준다. 렘브란트의 빛이 간음하던 여인에게 머무는 그 시선이 너무 귀하다. 정죄의 시선이 아니라 보호와 용서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양처럼 보여준다.
오늘도 교회 옆 미술관의 저자는 그림을 통해 보지 못하던 성경의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 그림을 연결해 성경 속의 정황과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들의 공격 그리고 늘 희생양이 되던 여성의 삶까지 조망한다.
나도 날마다 죄를 짓는 죄인이다. 그림 속의 예수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죄인을 향해 왼손을 가슴에 두고 여인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는 시선이다.
문득 렘브란트가 어떤 화가인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