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뚫기 Jun 17. 2024

이 것이 없으면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제3의 장소』 레이 올든버그 지음

살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에 빠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진짜 나는 사라져 껍데기만 남은 듯하고요. 이대로 살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는 느낌에 답답하고 우울해져요. 그 느낌이 오래가면 외롭고 고독해지도 하고요. 이런 상태를 ‘정체성 상실’이라고 한데요.


저 또한 수차례 ‘정체성 상실’을 경험했는데요. 그러나 그때마다 입시와 취직 전쟁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였어요. 살고 싶어서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을 덮어두고만 살았는데요. 하지만 문제를 덮어두기만 하면 곪아서 터지기 마련이잖아요. 결국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야 ‘정체성 상실’이 세게 오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숨 막히고 답답하더라고요.


저는 지난 1년 8개월 동안 제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춤을 배우는 등 여러 시도를 해왔는데요. 드디어 제가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자아 정체성을 선명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았어요! 혹시 여러분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오늘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거예요.


오늘 여러분과 저를 도와줄 책은 레이 올든버그의 『제3의 장소』입니다. 레이 올든버그는 미국의 도시사회학자로 미국의 도시가 어떻게 사람들을 단절시키고 고독하게 만드는 지를 설명하는데요.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저의 질문에 책은 이렇게 답해주었어요. “제3의 장소를 찾으세요.”


그럼 ‘제3의 장소’가 무엇이고, ‘제3의 장소’와 정체성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함께 가시죠!


[우구리의 글을 북라디오로 즐겨보세요.]

https://youtu.be/pDNFqifybsw?si=jNcKACVOX8TMoHq1



정체성의 진실


우리는 흔히 ‘자아 정체성’ 또는 ‘고유한 개성’이 자기 안에 있는 거라 생각하는데요. 따라서 어느 곳에 가건, 어느 누구를 만나건 나의 정체성과 개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제 생각은 달라요. ‘자아 정체성’ 또는 ‘고유한 개성’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요.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일시적인 현상인데요. 그러니까 어디에 가느냐 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개성과 정체성은 계속 바뀐다는 말이에요. 극단적인 상상을 해볼게요. 만약 우리가 영원히 혼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그때도 정체성이니 개성이니 하는 게 있을까요?


따라서 정체성은 ‘관계’가 있어야만 생기는 거예요. 쉽게 말해 어딘가에 갔을 때, 또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에라야만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자꾸 다투는 사람과 자주 만나면 저의 정체성은 ‘싸움닭’이 될 거예요. 반면 제가 자꾸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과 자주 만나면 저의 정체성은 ‘사랑꾼’이 되겠죠. 이처럼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가느냐 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덧붙여 우리는 고유한 패턴대로 반응하는 존재예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해도, 같은 사람을 만나도 다 다르게 반응해요. 누군가에게는 화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서 ‘개성’이 탄생해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내가 남들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같은지 알게 돼요. 나아가 어떤 때 내가 가장 빛이 나는 사람인지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바로 그게 나의 개성이자 정체성이라는 걸 알게 되어요.


따라서 나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은 ‘관계’ 예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가 그래서 중요해요. 바로 그 장소를 레이 올든버그는 ‘제3의 장소’라고 말해요.



제3의 장소?


레이 올든버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3가지 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요. 제1의 장소는 가정, 제2의 장소는 직장, 제3의 장소는 동네 공동체예요. 제1의 장소 가정은 주로 신체적·정신적으로 편히 쉬는 공간이고요. 제2의 장소 직장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는 공간이에요. 마지막으로 제3의 장소는 동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어울리는 곳으로 주로 술집이나 커피숍이었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1990년대, 2000년대에는 제3의 장소가 참 많았는데요. 예를 들어 동네 슈퍼, 동네 미용실, 동네 이발소, 동네 문구점 같은 곳이요. 동네 사람들은 약속 시간과 장소를 따로 잡을 필요도 없이 시시때때로 제3의 장소에 모여 대화하고 놀고먹고 쉬었어요.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었고, 또 가기 싫으면 가지 않을 수도 있었죠. 하여튼 늘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주던 곳, 바로 그런 곳을 제3의 장소라고 한데요.


지금 우리에게는 제3의 장소가 무척 낯설고 희귀한데요. 여러분이 제3의 장소를 보다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몇 가지 특징을 설명드려볼게요.


첫째, 제3의 장소는 언제든지 갈 수 있어야 해요.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건 시간적으로는 장시간 열려 있고, 공간적으로는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깝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부담이 되지 않게 저렴하거나 무료이고요.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언제 가더라도 어울릴 사람이 있어야 해요.


둘째, 제3의 장소는 공정해야 해요. 공정하다는 건 신분, 직업,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는 뜻이고요. 그리고 신분, 직업,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 말을 걸고 함께 놀 수 있어요.


셋째, 제3의 장소는 가고 싶을 때만 갈 수 있어요. 다시 말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는 건데요. 요즘 우리는 아무리 가벼운 사교 모임이나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해도 회비나 회칙이 있잖아요. 심지어 발을 깊이 담글수록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도 늘어나 부담스럽고요. 또 오랫동안 가지 않으면 다시 가기가 껄끄러워지기도 하지요. 반면 제3의 장소는 방문했을 때 매너만 지키면 돼요. 언제든지 가면 환대받고, 오랜만에 가면 오랜만이라고 환대받아요. 그리고 자주 가더라도 책임과 의무가 늘어나지 않아요.


넷째, 제3의 장소의 핵심 활동은 대화예요. 또는 잡담이라고도 하고요. 각자 어떻게 사는지에서 시작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뻗어나가고, 관심사가 통하면 취미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요.


다섯째, 제3의 장소는 확장성이 있어요. 제3의 장소에서 놀다 보면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관심사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연결되는 데요. 그 결과 연극, 춤, 토론, 노래, 자원봉사단 등 다양한 새끼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해요.


자 지금까지 제3의 장소의 특징을 소개했는데요. 제3의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조금 그려지시나요? 제3의 장소에서는 신분, 직업,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될 수 있고요. 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어요. 모든 사람들은 바깥세상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벗어던지고 가볍게 놀고 쉬고 또 뽐내려고 제3의 창소를 찾아요. 따라서 제3의 장소는 어울려 노는 곳 나아가 자아실현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제3의 장소와 정체성,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지금 저는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제 자신이 개성도 없고 특출 난 것도 없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제가 정말 고유하고 특별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


제가 정체성 상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독서 모임’ 덕분이에요. 저는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독서 모임에 갑니다. 독서 모임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건축 시행업자, 부동산 중개업자, 전기회사 직원, 회계사, 필라테스 강사, 체육시설 관리자, 공무원, 교사, 심리상담가, 서점 주인 등 직업도 다양해요.


책을 매개로 그분들과 토론을 하다 보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요. 하나는 그분들과 내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보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 지가 드러나요. 또 언제 제가 가장 빛나는 지를 알게 되면서 ‘나도 고유한 개성을 지닌 특별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다른 하나는 책을 매개로 다양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분들의 삶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더라고요. 사물, 사건 그리고 우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면서 ‘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깨닫게 되더라고요.


‘독서 모임’은 매주 일요일에만 모이는데요. 그래서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에요. 즉 ‘제3의 장소’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제3의 장소’로서 특징을 모두 갖추었는데요. 신분, 직업,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고, 회원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어요. 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요. 회비도 월 1만 원이어서 경제적으로 부담도 없고, 책을 매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요. 또한 관심사가 비슷한 성원들끼리 글쓰기 소모임, 감사일기 소모임, 유튜브 소모임, 칼럼 필사 소모임, 영어 소모임 등 다양한 새끼 모임이 탄생했다 사라지기도 해요.



사이공간 틈새


정체성 상실을 경험했던 제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서 고유한 존재가 되고 심지어 꿈도 품게 되었어요. 제 꿈은 ‘제3의 장소’를 창조하는 거고요. 이름은 ‘사이공간 틈새’라고 지었어요. 바쁜 삶 속에서도 틈틈이, 삭막한 사람들 사이에 작은 틈을 내고 싶어서 ‘사이공간 틈새’라고 지었어요.


‘사이공간 틈새’는 언제든지 와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곳이에요. 주기적으로 독서모임, 끼 발표회, 특강, 세미나, 워크숍, 책 출판 기념회 등 각종 행사도 운영할 거예요.


저는 ‘사이공간 틈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리 지기를 바라는데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스스로 발견하기를, 또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를 바라요. 나아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꿈꾸기를 바라요. 또 성원들이 어린 자녀와 나이 드신 부모님을 데려와서 남녀노소가 어우러질 수 있는 ‘제3의 공간’이 되기를 꿈꿔요.


그렇게 하려면 공간이 필요한데요. 생각보다 돈이 들더라고요. 여러분, 유튜브 채널 구독과 좋아요로 저 좀 도와주세요. 꼭이요.

매거진의 이전글 '노동, 돈, 소유'가 지겨우신가요? 이런 삶도 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