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돌아가신 날, 장례식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나는 마음껏 슬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지는 못해도, 차갑게 식어 버린 아빠를 떠올리며 마음껏 침울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슬픔과의 싸움이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은 돈과의 씨름이므로.
나는 딸만 셋인 집의 장녀고, 미혼이다. 즉, 아빠의 장례식에서 나는 상주였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역할에 정신이 없고 얼떨떨했다. 준비할 것이 뭐 그리 많은지, 슬퍼할 새도 없이 모든 것은 진행되었다.
“음식은 총 몇 인분으로 우선 주문할까요?”
“꽃은 몇 단 짜리로 하시겠어요?”
“조문 떡은 어떤 걸로 맞춰 드릴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주인공은 그냥 슬픔에 잠겨 조문객을 맞으면 되는 것처럼 나온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챙길 것도, 정할 것도, 결제해야 할 것들도 넘쳐난다. 그것도 오래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장례와 관련된 모든 결정 사항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야만 장례식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나는 몰랐던 사실인데, 고인을 이후 어떻게 모실지 까지도 거의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에 결정해야 한단다. 나 또한 화장을 할 건지, 유골함은 어떤 디자인이 좋을지, 납골당은 어디로 할지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결정해야 했다. 유골함 종류는 뭐 이리 많은가?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할 칸의 위치 가격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도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처음 알았다. 성인 평균 키를 기준으로, 눈높이와 맞는 칸이 당연 가장 비싸다. 맨 밑이나 맨 위는 당연히 가격이 낮아지지만, 그 또한 칸의 크기에 따라 또 달라진다. 거의 모든 결정과 동시에 결제가 진행되었다. 즉,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문객분들이 하나둘씩 방문해 주시기 시작했고, 장례식은 더 정신이 없어졌다. 얼굴을 아는 손님들이 하나둘씩 방문해 주실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울 수는 없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신경 쓸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미리 주문한 식사가 부족하기 일쑤였다. 당일 주문해둔 식사량이 부족할 것 같으면, 주방이 닫히기 전에 추가 주문을 해야 했다. 또, 쉴 새 없이 배송되어 오는 화환을 어디에 둘지 등의 다양한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저희 추가 근무 수당 지금 주셔야 하는데요? 현금으로요.”
장례식 도중, 식사 차림을 도와주시는 여사님들께서 상주인 날 갑자기 붙잡고 하신 말이다. 당연히 드려야 하는 비용이었고, 예상보다도 훨씬 많이 찾아주신 손님들을 위해 선뜻 추가 근무를 해주신 여사님들께 감사했다. 하지만, 당장 아빠를 잃은 나에게 그 말은 지금까지도 가장 당황스러웠던 말로 기억되고 있다. 우선, 현금을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는 요즘이었지만 상복 차림으로 절하기 바빴던 내게 현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계좌 이체로 도와드리면 안 되겠냐고 묻자, 상당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현금을 고집하셨다. 총 50만 원이 넘는 현금을 당장 어디서 빼온단 말인가? 손님들께서 전달 주신 부의금은 정산 전엔 당연히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이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손님들은 계속 들어오고 계신 중이었다. 이때만큼은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여사님은 추가 수당을 꼭 현금으로 받으셔야 하는지. 왜 나는 나이 서른에 상주여야 하는지. 왜 사랑하는 아빠는 내 곁을 떠나야 했는지까지 모두. 잠시 패닉에 빠진 내게 현금을 고집하는 여사님의 말은 이렇게 들렸다:
“상주님, 나중에 슬퍼하시고 결제 먼저 좀 해주시겠어요?”
혼자 쩔쩔매고 있는 와중,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건 곁에서 유심히 대화를 듣고 계시던 고모 부셨다. 고모부는 지갑에서 적지 않은 금액의 현금을 선뜻 내어주셨다. 며칠 뒤, 고모부에게 그때 꾼 돈을 갚으며 새삼스런 인사를 드렸었다. 그때만큼 고모부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졌던 때가 없었다고.
그래도 아빠의 장례식은 시끌시끌, 복작복작해서 좋았다. 제일 큰 공간을 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붐비는 손님들로 자리는 쉽게 비지 않았다. 빡빡이 들어선 화환은 전체 홀을 모두 채우고도 모자라 입구까지 넘쳐 나와 있었다. 많은 분들이 아빠를 사랑해 주셨나 보다, 생각했다. 나는 그것으로 위로와 힘을 얻어, 겨우 사랑하는 아빠의 장례식을 버텨낼 수 있었다.
진짜 슬픔은 이제 시작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