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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Aug 25. 2024

11분 드립니다

전자렌지1분 조급증자는 안되요

험난한 밤을 보냈어요. 그런데도불구하고 어제와같은 햇살, 어제와같은 오후4시. 어제와 같은 시각에 노래연습을 하는 아리엘이 어제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네요.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나스의 아름답고 무성한 잎이여, 그대를 위해 운명은 반짝인다, 천둥 번개 태풍이라할지라도 그대의 아늑한 평화를 범하지말라" 내가 아는 가장 짧은 아리아 "Ombra mai fu"에요. "Largo"라는 기악곡으로 더 유명하죠.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1막을 여는 아리아에요. 


나는 뭐든 짧은건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노래도, 오페라도 짧은것보다 긴걸 좋아하고, 소설도 단편보다 장편을 더 좋아해요. 하다못해 치마도 긴치마가 좋아요.  그런 나지만 3분정도 소요되는 이 짧은 아리아가 오늘은 싫지 않아요. 방금 언급한것처럼 지난밤이 좀 험난했거든요. 두꺼운 벽돌로 만든 창고라 우선 벽돌을 깨부셔야했어요. 들어가는데 시간이 좀 걸리더군요. 오전에 잠시 눈을 붙였지만 아직도 많이 졸려요. 저녁밥도 간단하게 후다닥 만들어 먹는 파스타, 알리오올리오로 해야겠어요. 마늘은 편으로 썰고, 깨끗이 닦은 페페론치노는 가위로 조그맣게 잘라요. 이탈리안파슬리는 다지듯 잘게 썰고요. 달구어진 팬에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두르고 편마늘과 페페론치노를 넣어요. 소금과 후추도 한꼬집 뿌려요. 그런다음 중불에서 달달 볶아줘요. 따로놀던 마늘과 페페론치노가 서로 어우러져 맛나향을 뿜어내요. 따로도 좋지만 어우러지면 더 좋은 마늘과 페페론치노, 자주 쓰는 식재료에요.


팬에 오르기전의 마늘과 페페론치노처럼 서로 겉도는 사람들이 생각나내요. 떼어놓고 보면 그럴수 없이 좋은 사람들이지만 서로에게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말이에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호세 카레라스와 플라시도 도밍고, 테니스코트 하면 떠오르는 마리아 샤라포바와,세레나 윌리엄스 등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야해요. 늘 밤잠이 부족한 나지만 또한번 밤을 새우더라도 빼놓고 갈수 없는 두 사람이 있어요. 카라얀과 번스타인이죠. 어젯밤에 만났어요. 벽돌로 지은 창고안에서요.  단원들과도 밥을 먹지않았다는 카라얀이 입안에 모래같았을 번스타인과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더군요. 상상이 되시나요? 밥은 아무나하고 먹지 않잖아요. 나는 그래요.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아끼고싶은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 닮고싶은 사람. 뭐 그런 사람들과 밥을 먹거든요. 은근히 디스하는 두사람...참, 나... 그러니 구미가 확 당길수 밖에요. 일단 입맛이 당기면 좀 딱딱하고 거칠어도 꼭꼭 씹어먹어요. 잘게 다져 삼키면 피가되고 살이되거든요.


내 피와 살속에, 씹어삼킨 클래식음악이 침투한건 40여년전이에요. 한 남자의 옆모습에 끌려 클래식에 엎어졌죠. 클래식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입문만 했어요. 아는거 하나없는 허당이란 말이죠. 듣기가 취미라, 취미에 충실하려고 카리스마 작렬하는 카라얀의 CD를 구입하고 <베토벤 9번 합창>에 빠져들었어요. 그러다 슈만, 차이코프스키, 말러를 들었어요. 말러를 듣다가 말러전곡을 녹음한 번스타인을 만났죠. 그때까지 지휘자는 카라얀만 있는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세상에나, 자신만의 독특한 색과 향으로 유혹하는 마에스트로가 그렇게 많을줄이야 .... 카라얀에서 번스타인, 번스타인은 말러, 말러는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소개 하더군요. "딱 한사람 만날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백번쯤 묻는다면 그 모두에 '아바도'라 답할 나에게 말이에요. 그러니, 아바도를 소개해준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만났다니, 그것도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니 부럽고 궁금할수 밖에요. 붙잡을 그 무엇이 필요할때 나를 붙들어준 아바도를 만나게한 두 거장, 카라얀과 번스타인. 질주하는 기차에 올라타고 말았어요. 쿵쾅쿵쾅.


쿵,쾅, 쿵, 쾅, 부수고 들어갔어요. 창고주인은 아주 영리했어요.  식탁으로 잡아당긴 시선을 "지휘의 발견"으로 끌고들어가더군요. 서울시향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볼수 없는 저같은 변방인에게 유럽과 북미를 대표하는 두 마에스트로를 근거리샷으로 보여줘요. 에피소트 몇컷을 제시하면서요. 예를 들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한장면이요. 그들이 처음 만난 1955년도의 일이죠. 카라얀에게 번스타인이 말해요. "제가 지금껏 경험한것 가운데 최고의 오페라 지휘였습니다.(...) 물론 제 지휘를 빼고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지만요"라고요. 카라얀의 <카르멘>을 본후 꺼낸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감상평이었죠. 나이를 거론하고 싶진 않지만 가끔은 꺼내야할때가 있어요. 번스타인은 카라얀보다 열살 어려요. 어쩌면 막내동생 같았을 번스타인에게 칭찬을 가장한 모욕이라니.... 상상이나 했을까요?  펀치는 두고두고 쓰라렸을거에요. 1979년,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 하모닉에서 <말러교향곡 9번>을 연주했어요. 창고 주인장이 설명해요. "번스타인은 뉴욕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연주할때 단원들에게 나눠준 각 파트의 악보가 오지않은겁니다"라며 카라얀의 굵직한 펀치를 소개해요. 끝내 악보집을 받지 못한 번스타인은 몇달후 출시된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반을 만났겠지요. 알고있던 이야기는 선명해지고 몰랐던 이야기는 기쁨이 되는 순간이에요. 비록 식탁에 끌려들어와 날밤을 세웠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지적 허기를 채워주는 고마운 창고에요. 


두 거장의 복수극으로 지적 허기를 채워도, 고픈배는 음식이 아니면 해결이 안되요. 그럴땐 "사유의 나라 포루투갈"에 들어가 올리브유바른 정어리캔을 따고 포루투 와인(Porto wine)을 마시면 되요. 비록 캔과 와인 한잔이지만 처음 먹어보는 포루투갈산 정어리와 와인은 만족도 백프로에요. 와인과 정어리로 기운이 차오르면 이제,"오페라의 수도 세비야, 기타의 왕국 스페인"을 거쳐 "일본 근대화의 시작과 끝 나가사키" 를 지나고 "안탈리아 그리고 로마"를 돌아 "드디어 종묘"로 가요. 서울살때도, 지척인 일산에 살때도 가보지 않은 종묘를 천원이면 입장한다고 광고를 하니 안가볼수 없잖아요. 광고회사CEO라는 이력답게 지능적이고 센스있어요. 게다가 경로우대증이 있으면 프리패스라네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들이키는 사람들의 구미를 또한번 확 끌어당겨요. 아무래도 이분 뼈대는, 자석으로 만들어진게 틀림없어요. "합창의 추억"을 꺼내면서는 고교시절 합창단을 지휘해 우승을 했다며 자랑하데요. "지휘의 발견" 번역자(이석호)의 말을 인용해 "핸즈온(hands on)"했다고요. 자랑하고, 광고할만해요. 역사,미술, 지리, 음악, 문학,종교, 영화...모르는게 있어야말이죠. 그 옛날, 지금은 전설이된 차인태아나운서가 진행한 장학퀴즈에서 우승한 실력자니 믿고터는 창고 맞아요.


'믿고털라' 소개 하지만 털기전에 준비할게 있어요. '시간'이요. 최소한 11분. 전자렌지 돌아가는 1분에 조급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벽돌을 깨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특별 장착해야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요, 뭐든 처음이 힘들지 깨지기시작하면 잘 깨지는게 벽돌이더군요. 수고한만큼 건져올릴것도 많으니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게되요. 가끔, 찬가대신 시조를 읊는이도 있어요. '깨고 또 깨면 못깰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 깨고 벽돌만 두껍다하더라.'.... 제가 아는 가장 짧은 아리아 <옴브라 마이 푸>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노래죠. 온밤을 하얗게 지새워 창고를 털다보면 가끔 이런 '믿거나말거나 시조'가 양산되기도 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실보다 득이 많은 창고는 털고봐야죠.


실보다 득이 많은 창고에서 실실 웃다보면, 가끔 깨부신 돌을 두번깨는 신공도 발휘해요. "평범하지만 완벽한 하루"를 보내는 오늘같은 <퍼펙트 데이즈>에 말이에요. 어제와 같은 아침, 어제와 같은 하늘을 다시보게 만드는 "화장실에서 찾은 퍼펙트데이즈". 베르사이유궁전에 화장실이 없는 이유와 화장실의 역사. 화장실청소로 성공한 CEO 등. 벽돌깨기 신공으로 얻는 정보가 새털만큼이나 많아요. 처음엔 정보를 털었어요. 다음엔 창고주인장의 질문에 답하려고 또 털었어요. 두번째 털기.... 허탈하데요. 내가 턴줄 알았는데 가만보니 제가 털린거에요. 내 멘탈이 탈탈 털렸더란 말이지요. "당신의 퍼펙트데이즈는 언제인가요?"라 묻고, 바로 대답한 "바로 오늘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털렸구나' 싶었죠. 


특별할것 없이 반복되는 나의 '오늘'이 퍼펙한 날이란걸 어찌 알았을까요. 아무일도 일어나지않아 무심하고 지루한 매일을 퍼펙한날이라 할수 있나요? 과거가 있는 사람만이 대답할수 있는 날이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내 과거를 알고 있어요. 험난한 과거요. 관계의 어려움이든 경제적인 문제든, 고난의 강을 건너보지 않은 사람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요. 주인공 히라야마의 퍼펙트 데이 역시 과거가 만들어준거라 추측 했어요. 그의 눈빛과 행동은 물론, 취미나 읽는 책의 제목만 봐도 상상이 되던걸요. 자신만의 "광야"를 통과한  사람이란걸요. 나도 그런 광야에 서 봤어요. 그래서 알아요. 매일처럼 반복되는, 아무일없는 오늘이 퍼펙트데이란걸요. 찢기고 넘어진 그 모든 날들이 있었기에 퍼펙트한 오늘과 만나요. 그러니 영화제목도 "퍼펙트 데이"가 아니라 <퍼펙트 데이즈> 아니겠어요?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하지 않아 더 좋은 날이에요. 어제와 같은 오늘, 어제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내친구 아리엘도 좋고요. 무엇보다 나를 탈탈 털어주신 센스만점 마하, 하광용작가님 창고가 좋아요. 그래서, 밥솥대신 '좋아요' 먼저 눌러놓고 요리해요. 마늘과 페페론치노, 파스타면만 있으면 만드는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로요. 너무 많이먹어 탈인 요즘, 가끔은 이렇게 심플한 음식이 필요해요. 매콤하고 담백한맛이 그만이죠. 그렇지만 그동안 흘리신 땀방울을 생각하면 이걸로는 안되요. 단백질도 필요하고 비타민과 미네랄도 보충해 드려야겠어요. 아쉬운대로 손바닥만한 가리비가 있어 손질해 두었어요. 세개면 충분하지싶어요. 앞면과 뒷면 골고루 굽고 달콤새콤 크림소스를 끼얹어 면위에 올렸어요. 곱게 썬 파슬리를 뿌리면 완성이에요. 


이제, 냉장고에 넣어둔 와인을 꺼내올게요. 칠레산 화이트 와인 "몬테스 알파 블랙 라벨 샤도네이(Montes Alpha Black Label Chardonnay )" 한잔, 어떠세요? 와인을 그다지 선호하시지 않는단건 이미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누가 알아요? "좋은데" 하실지.  히라야마에게 찾아온 조카 니코처럼, 기대치 않은 균열로 작용할지. 아니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가님처럼, 히라야마가 발견한 *코모레비가 될지 누가 알겠는지요. 뜻대로 흐르지 않는 생(生)의 한 가운데서 마시는 시고 떫은 한잔. 지금 쓰는 자(작가)들의 시고 떫은"오늘"에 완벽한 페어링(pairing)인걸요. 그래서, 오늘도 치얼스!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금은보화가 무지많은 창고에요. 열쇠도 필요없어요.

https://brunch.co.kr/@kay6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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