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Dec 03. 2022

착각의 계절

가을, 그토록 애틋한 것들과 나

  나이가 들어가니 착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내 생일이 있는 가을에는 유난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서른넷이 된 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난 줄 알았는데, 생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제야 그 나이가 됐다고 또 착각합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사실 지나온 햇수를 따지나, 맞이한 생일을 세어보나, 그걸 생각하는 지금에서야 어쨌든 서른넷인걸요. 저는 또 이걸 해마다 착각한 걸 두고, 괜스레 가을의 깊은 밤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생일 아침, 가을


  하늘은 아득히 멀어지고 바다는 또 깊어진 듯, 세상의 모든 푸른빛이 단단해져 갑니다.

  가을이 온 줄만 알고, 이른 아침부터 멀리 산책을 나섰다가 더위가 뭍은 날씨에 지쳐 돌아오는 것 또한, 해마다 하는 저의 착각입니다. 날씨 예보를 챙기지 않은 건 제 잘못인데, 애꿎은 9월에게도 그 몫이 있다고 꾸짖었더니 금세 어두운 기색을 보이고 마네요. 어제보다 빨리 밤을 부른 것 보니, 흉내는 또 제법입니다.


  착각(錯覺)이란 단어의 ‘착’ 자에는 어긋나다, 라는 뜻과 함께 섞이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단순히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더해서, 그 둘이 섞이어 힘을 겨루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여름과 가을이 섞여 드는 이즈음, 일찍이 거미는 가을바람을 피해 처마를 떠나고 동백은 벌써부터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가을이란 그렇게 만물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저는 나이를 헷갈려하는, 착각의 계절이라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습니다. <저거 민머리다!> 출근길에 재밌는 걸 발견했다며 친구가 이런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보내온 적이 있습니다. 어긋난 녹색 잎이 무성한 폭낭(팽나무의 제주말) 아래 동백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동백의 꽃송이들이, 윤기가 흐르는 잎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게 앙증맞아 자꾸만 눈이 갔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제 문자에 그가 답해왔습니다.

  

  <아래만 꽃이 피고 위로는 초록 잎만 가득한 게, 꼭 네 머리 같아!>


  “내 머리가 어때서.” 저는 중얼거리며 손을 머리로 향했습니다. 드러난 정수리를 겨우 메우고 있는 머리칼들 사이로 매끈한 살갗이 만져졌습니다. 아, 그 순간의 감정을 헤아리느라 절로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실제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던, 휑한 윗머리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습니다. 잔뜩 움츠린 미간을 타고 올라온 열이, 손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었습니다. 이후로 저의 머리 손질은 말 그대로 마른 논에 물 대기였습니다. 외출 전, 애써 기른 옆머리로 정수리를 덮고, 남은 머리로는 이마를 가립니다. 한쪽을 채우면 한쪽이 비고, 정수리에 집중하면 기이한 이마가 무방비로 노출되고 맙니다. 왁스 양이 많았거나 드라이의 열 조절에 실패한 것입니다. 다시 머리를 감고 손질하기를 반복한 끝에, 좀 괜찮다 싶으면 약속 시간이 다 돼버립니다. 급히 옷을 입고 뛰어나가다 골목에 주차된 차에 제 모습을 비춰봅니다. 땀으로 범벅된 머리 탓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따로 없습니다.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몰랐던, 조금 길쭉한 머리의 꼭대기. 마른 정수리에 물 대는 그 일에 저는 무던히도 열심이었습니다. 친구가 말한 민머리란 팽나무의 잎이었습니다. 두 나무가 겹쳐 보여 한 그루로 착각한 그의 농담은, 꽃이 피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제 빈 정수리에 빗대어 말한 것이었죠.


  뿌연 거울 앞에 선 제 모습이 익숙한 걸 보니, 그동안 꽤나 부정하며 살았나 봅니다. 샤워를 하다 말고 잡히지 않는 머리칼을 애써 쓰다듬었습니다. '더 나빠지진 않을 줄 알았는데.' 정수리를 덮던 히스테리 가득한 손짓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제게 친구의 농담은, 한순간에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안타깝지만 정수리는 이미 틀린 것 같았고, 남은 꽃들이라도 잘 지키리라 다짐한 날이었습니다.


  그 뒤로 얼마 동안, 제 안엔 거울 속 머리를 향한 ‘애틋함’이 가득했습니다. 손질되지 않은, 휑한 정수리를 바로 본 일도 오랜만이었습니다.

  ‘애틋하다’라는 단어에는 언젠가 우리가 겪었던, 하지만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있습니다. 그건 ‘애틋하다’라는 형용사가 꾸며주는, 명사들이 가진 어떤 결핍의 이미지 때문이겠지요. '애틋한 사랑, 애틋한 추억, 애틋한 나날.'  이 단어들을 읊조리는 순간, 여름과 가을이 섞이어 뚜렷한 계절이 되지 못한 '만물이 스며드는 가을’ 같던 청춘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종종 애써 가려왔던 옆머리들을 걷어내고, 거울에 윗머리를 비춰봅니다. 꽃이 진 자리나 첫눈이 적셨던 공원의 자갈을 마주한 것처럼, 못내 야속한 기분이 듭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우리는 단풍의 색이 바래가고, 흰 눈 곳곳이 무너지는 장면을 복기해버리고 맙니다. 야속하게만 느껴졌던 그 순간을 돌아보는 일이란, 사실 자신을 위로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애틋하다'라고 꾸밀 수밖에 없는, 그날들에 품었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더욱 애착했던 그 뜨거운 기운들을, 천천히 식히며 날려 보내는 중이지요.


  

  애틋한 가을처럼, 우리 마음엔 늘 무언가가 섞여 있어 힘을 겨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완성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걸 알지 못했기에 우리는 청춘을, 마지막인 것처럼 버티듯 살아냈을지도요. 결국 우리 삶에 그토록 애틋한 것들이란, 자신의 청춘과 닮았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생일을 맞은 어느 가을밤, 못내 창밖을 노려보았던 것은 여름내 처마를 지키던 거미의 빈자리 때문입니다. 한 해에 두 번이나 나이를 먹었다고 착각해서입니다. 가슴 언저리에 섞여 있는 애틋한 것들이 떠올라서입니다. 생일에는 왠지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을 닮아, 가을이란 제게 착각의 계절인가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여기서 살 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