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가을에
새로 6시, 건넛방 큰애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수학 참고서를 보고 있다. 작은 애는 아직 이불속이다. 나는 안방, 건넛방 이불을 탈탈 털어 장에 넣는다. 이어서 빗자루질과 걸레질까지 쓱 쓱… 처가 아이들 아침을 준비한다. 연두부. 포도. 바나나. 낫또. 밥과 김치. 비타민 알약 등등. 둘째는 금방 먹고 이불을 돌돌 말아 또 뒹굴뒹굴하며 핸드폰을 본다. 큰애는 제 책상에 딱 붙어 세월아, 네월아, 참 느리게 먹는다.
7시 30분, 물통을 챙겨 신발 신고 있는 큰아이 가방 옆에 찔러 준다. 오늘은 셔틀버스 타는 것까지 지켜보기로 한다.
“ 잘 다녀오세요” 아이 등 뒤에 대고 소리친다.
“안녕하세요!”, “ 감사합니다.” 셔틀버스 기사님과 인사한다.
아이가 기사님께 인사는 하는지 모르겠다. 워낙 무뚝뚝한 녀석이라….
이제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고 춥기까지 하다. 문을 여니 쏟아지듯 덤비는 바람이 좋다. 더위가 지긋지긋하더니 완연한 가을이다. 어린 시절 할머님이 “ 너는 음력 9월 소띠고 새참 먹을 때 났으니 평생 바지런히 살겠구나!” 하시던 말씀이 가을이면 새롭다. 과연 그런 것 같기에.
작은아이는 늘 8시 가까이 뒹굴뒹굴하더니 오늘은 숙제한다고 한 20분 누워서 영어 쓰기, 읽기를 한 후 목욕한다. 두 아이가 너무 대조적이다. 큰아이는 자기 전 밤에 한참을 닦고, 작은애는 잔소리해도 꼭 아침에 등교 전 목욕한다.
9시, 처가 챙겨준 간식과 신문을 가방에 넣고 이어폰을 끼고 뉴스를 들으며 작업실로 향한다. ‘공천개입 의혹’, ‘K, M 압수수색’, ‘여론조사’,‘의정 갈등’, ‘특검법안 거부권’ 등 흥미진진한 뉴스가 계속이다.
큰 사거리 지나 ‘타잔 놀이터’ 부근에서 핸드폰을 꺼내 고개 들어 사진 몇 컷 찍는다. 하늘은 높고 맑아 푸르르며,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작은 속삭임을 남긴다. 벤치에 잠시 앉아 느리게 심호흡하며 내면을 들여다본다. 땀 흘린 뒤 뺨 위에 스치는 바람결이 소중한 행복의 조각임을 깨닫는 시간이다. 바람의 소리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
반쯤 지하, 작업실 문을 열자 방금까지 있었던 듯 여름날 끈질긴 질척한 습기 냄새가 아직이다. 키다리 선풍기를 회전시키고 흡기, 배기 환풍기도 틀어놓는다. 노트북을 열어 유튜브 방송을 틀어놓고 데스크탑 컴퓨터도 부팅해 놓는다. 캡슐커피를 커피머신에 넣는다. 드르르. 드르르. 오늘따라 살며시 조심스레 두드리며 경쾌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그림과 나’ 파일을 연다. 육십 이후 미니멀한 삶, 또는 ‘버리기, 비우기’의 일환으로 노트에 쓰던 ‘오프라인 일기장’을 없앤 지 3년째 되었다.
평생 꿈꿔 온 전업작가의 모양새를 갖추고 하루의 대부분 작업실 생활을 하고 있다. 처와 아이들의 배려가 고맙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 날마다 허송세월에 가깝고 여전히 무명의 삼류작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애써 웃으며 스스로 응원하고 가끔 미친놈처럼 작업에 열중하기도 한다.
“겸허히 홀로 명상하듯, 경건한 기도처럼!”
요 며칠 작업에 탄력이 좀 붙는 것 같다. 명퇴 후 1년여 준비한 작년 4월과 7월, 두 차례 개인전 이후 변화된 경향이 보인다. 너무 자잘한 설명과 복잡한 화면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주제와 소재로 선택한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 형태에 대한 은유와 단순화된 조형성, 파스텔톤의 색사용 등이 훨씬 구체화되고 견고해짐을 느낀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기둥형 사각 상자 캔버스의 입체 설치 형 오일 컬러 페인팅도 곧 시작할 것이다.
오늘은 멀리 안 나가고 위층 상가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매일 듣는 2시경 유튜브 방송을 켜놓고 작업을 이어간다. 진행된 과정을 꽤 오래 주시한다. 물통을 비우고 붓을 닦고 작업의 흔적을 정리한다.
5시가 되었다. 처가 큰애를 픽업해 귀가시키고 학원 가기 전 간식 등을 먹을 시간이다. 잠시 집에 들른다. 나도 간식을 먹고 빨래를 걷고 널고 집 안 청소와 설거지를 한다. 집 근처 인라인장에서 만 보 걷기를 마치고 다시 작업실로 가 한 세 시간 더 머물다 귀가한다.
아이들이 배달시킨 치킨을 먹고 있다. 나도 끼어 몇 점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12시가 거의 되었다. OTT 플랫폼으로 최근 빠져 있는 드라마를 본다.
“ 아빠 불빛 때문에 잠 안 와” 중1 둘째가 짜증을 내자 핸드폰을 끄니 금방 잠에 빠져든다.
문득, 지나온 날들 속
지나쳤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가을 한낮 땡볕처럼 따갑던 질투, 미련
흐르는 시간 속에서 덧없다.
가을하늘. 숲 속. 바람 소리가 마음의 평화로 다가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영원의 눈을 감는다.
오늘은 별일 없던 완벽한 하루였다.
2024.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