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 딸과 아내와 함께가게를 보러 갔습니다. 딸은 그전에도 혼자 틈틈이 가게를 보러 다녔는데, 그날은 왠지 저보고 같이 가자고 하였고, 마침 아내도 시간이 나서 셋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딸과 대화할 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자 하는 사업과 입지 조건을 충분히 살펴보고 천천히 진행하자고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에, 그날 아내와 저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섰습니다.딸이 실제로 가게를 계약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형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해 있는 광안리해수욕장 인근의 한 주택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사전에 예약해 둔부동산 중개인을 만나 그분의 차에 올랐습니다. 중개인이 자기 차로 주변을 돌며 상권 설명을 해준다고 하였습니다.젊은 남자였는데 인상도 괜찮고 자기 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특히 상가 중개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요. 차로 골목 이곳저곳을 돌며 이미 성업 중인 가게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주변이 원래 주택가였는데 군데군데 일반 주택을 상가로 개조하여 카페나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미 유명해진 맛집도 여러 곳 있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상권이 계속 좋아지는 동네라며 상권 소개를 마친 후, 북카페를 열만 한두곳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곳 다 일반 주택을 상가로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첫 번째 집은 임대 매물이 1층이었는데 출입구 옆의 정원을 함께 사용할 수가 있어서 모양이 예쁘게 보였습니다. 괜찮겠다 싶었죠. 두 번째 집은 대상 매물이 2층이었습니다. 1층은 식당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북카페가 커피 테이크아웃 매장처럼 접근성이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2층도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딸은 특히 다락방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옥상도 쓸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살펴본 두 곳 다 공간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 여건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게 보였습니다. 저야 딱히 당장 계약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 이곳이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아내와 딸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그날밤, 딸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사위와 의논하였는데 가게를 계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 다락방이 마음에 든 이층 집으로 말이죠. 딸이 그렇게 급하게 결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는 마당에 이왕이면 힘을 실어주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도와줄게 한번 해보자' 하고 답을 보냈습니다. 주말에 딸이 사위와 가게를 한번 더 둘러보았고,월요일 저녁에가게 계약을 하였습니다.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결혼해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그에 반해 저희 딸은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아들까지낳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지 모릅니다. 하지만 육아에는 엄마의 많은 희생이 따르죠. 이 세상의 모든 엄마와 마찬가지로 저희 딸도 육아에 진심입니다. 외손자가 입을 떼며 말 배우기를 하면서부터 고난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거뭐야?' '이거뭐야?' '이거뭐야?' 하루에 천 번은 묻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딸은 꼬박꼬박 대답해 줍니다. 단 한 번도 대답을 빼먹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외손자는 남자애 치고도 정말 활동적입니다. 단 일분도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천방지축이죠. 장난도 많이 치고, 사고도 많이 치고, 잠시도 한눈을 팔면 안 됩니다. 그래도 딸이 외손자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늘 좋은 말로 타이르곤 합니다. 저희 부부가 봐도 정말 대단한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돌봅니다. 그리고서는 돌아서서 '어휴, 죽겠다'하며 힘들어합니다. 부모로서 그런 딸이 안쓰러워 틈틈이 딸네 집에 가서 외손자를 봐줍니다. 그래서 저도 딸 집에 자주 들르고 자연스럽게 딸과 이야기를 나누며 딸의 고민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은 본사가 부산인 회사에 입사하였는데, 근무지는 마곡에 있는 연구소였습니다. 육아휴직이 끝날 무렵 부산본사 근무를 희망했죠. 하지만 회사 사정 상 그럴 수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어린 아들을 놔두고 서울 부산을 오가며 주말부부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득이하게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요. 여전히 우리나라는 여성이 육아를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기에는 힘든 나라입니다. 일반 기업체에서는 더욱더 직원들의 세세한 사정을 헤아려줄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로서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딸은 육아 스트레스와 자신의 경력단절 등에서 오는 힘든 마음을 독서로 풀었습니다. 집에 가면 늘 읽는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죠. 종류도 다양하고 내용이 어려워 보이는 책도 많았습니다. 책을 읽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안정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딸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찾았습니다. 책과 관련된 일.북카페, 독립서점 등을 둘러보고, 가게를 열만 한 상가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했습니다. 책방을 열기로. 요즘같이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 책을 팔아 돈 벌기는 힘듭니다. 그건 저도 알고 딸도 잘 알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책을 팔아 돈 버는 건 안된다. 돈 버는 아이템은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요. 딸은 아이디어가 많습니다. 저는 딸을 믿습니다. 이래라저래라 간섭은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타깃 고객층이 젊은 세대인데 나이 든 제가 나서면 안 되겠죠.그저 딸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딸이 가게를 알아보러 다닌다고 할 때, 걱정을 태산같이 했던 아내는 막상 딸이 가게 계약을 하자 임차보증금을 대준다고 나섰습니다. 부모로서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겠지요. 아내는 돈을 대고, 딸은 아이디어를 내고, 저는 몸으로 때우고. 그렇게 딸과 아빠의 북카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