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별과 흰 별 사이
인터스텔라_대한민국 편 #2
3.
우주탐사선 희망호는 여전히 캄캄한 우주공간을 날고 있었다. AI의 분석대로라면 이제 며칠 후면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었다. 과연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정말 외계문명이 있을 것인가? 그동안 항해를 하며 전해오는 신호 분석을 거듭하였지만 여전히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하였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전혀 경험치 못한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곳에 도착하여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목적지를 목전에 둔 어느 날, 김태평 박사는 이한나 박사와 중력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지구에서와 비슷한 중력이 유지되는 중력실에서의 두 시간의 운동. 우주인에 있어서 그 시간은 체력 유지를 위해서 결코 하루도 거르면 안 되는 중요한 일과였다. 다섯 개의 트레드밀이 죽 늘어선 공간에서 두 사람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달렸다. 고대시대에 트레드밀은 죄수에게 벌을 주는 도구였지만, 지금은 운동으로 승화되어 스스로 오르는 기구가 되었다. 노동의 대가로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게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데, 트레드밀이라는 수확 없는 노동. 죄수를 괴롭히기에 더 없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그 형벌의 틀 위에서 30분을 빠르게 달린 후 속도를 늦추고 가쁜 숨을 고르며 이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떤 언어를 쓸까요?"
"예? 누가요?"
"우리가 가는 곳에 말이에요. 김박사님은 외계문명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르죠.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고."
"저는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정말 기다려져요. 그들에게 첫 말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멋진 말이어야 할 텐데 말이죠."
이한나 박사는 이번 항해에 정말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언어학자인 그녀는 고대 이집트어, 메소포타미아어, 중국의 갑골문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여 온 언어의 분류체계를 정리하고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연구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항해의 목적인 외계문명을 접하게 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외계문명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말이 통하기는 할까요?"
"알아내야죠. 인류도 처음부터 언어가 있었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유사한 진화과정을 거쳤다면 의사소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하, 그렇겠군요. 역시 전문가라 다르시네요."
둘은 트레드밀에서 내려와 이온음료가 든 컵을 집어 들었다. 땀을 빼며 갈증을 느꼈을 인체에 이온음료가 빠르게 스며들며 밸런스를 맞춰줄 것이었다. 목젖이 움직이며 음료를 넘기는 그녀의 목덜미가 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녀였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탐을 낼만한 육체의 소유자. 김박사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였음에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보면 '정말 예쁘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욕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주탐사선의 항해목적이 짝을 찾는 것도 아니고, 우주선이 연애 장소가 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짝짓기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되어야 했다. 승무원들에게 성욕을 억누르기 위한 약물이 이온음료에 섞여 공급되었다. 그리고 이온음료와 함께 몸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긴 우주생활에서 오는 둔감함 정도로 여겼다. 그것도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남들에게는 말 못 하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4.
그 일이 터지기 전, 김박사는 잠을 자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그리고 그 위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 떼. 그는 야트막한 언덕 위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양몰이 개가 눈을 부릅뜨고 양 떼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끼양 한 마리가 무리를 빠져나와 노란 꽃이 가득 핀 꽃밭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양몰이 개가 귀를 쫑긋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며 달려 나갔다. 양몰이 개가 꽃밭에 닿는가 싶을 때, 꽃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커다란 회색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늑대를 본 새끼양이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어 달아났다. 그가 있는 쪽이었다. 그 뒤로 늑대가 쫓아오고 또 그 뒤로 양몰이 개가 쫓아왔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가 옆에 놓인 사냥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새끼양 너머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고 있는 커다란 늑대를 겨누었다. 새끼양과 늑대와의 간격이 좁혀져 거의 닿을 때쯤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총알이 늑대의 가슴팍에 박히며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늑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내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가리를 쩍 벌린 늑대가 그를 덮쳤다. 그리고 그의 왼쪽 어깨를 덥석 물었다. '악!' 그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이었다. 새끼양도 늑대도 양몰이 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어루만져 보았다. 시큰하는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휴!' 한숨을 내뱉은 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쿵!' 우주비행선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이 전해지고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김박사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비틀하며 난간을 붙잡고 도로 주저앉았다. 스피커를 통해 AI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암석지대에 접근 중. 전원 정위치 바람."
김박사는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방문을 나섰다. 복도에는 그 외에도 몇몇 승무원들이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조종실로 향하는 도중에도 심한 진동이 계속되었는데, 아마도 작은 암석들이 선체로 날아들다 프라즈마 보호막에 퉁겨져 나가는 모양이었다. 우주를 초고속으로 항해하는 우주선에 있어서 다른 물체와의 충돌은 치명적이었다. 우주공간이 아무리 진공상태라고 하더라도 미립자부터 다양한 성간물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 요소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에 대비하여 희망호에는 프라즈마 보호막과 여러 대의 레이저 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작은 물체는 프라즈마 보호막으로 방어하고, 그 정도가 넘는 물체는 레이저 포로 파괴하거나 방향을 틀어 선체와의 충돌을 방지토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어 시스템에도 한계가 있었다. 너무 큰 암석을 만나 충격을 감당할 수 없거나, 충돌하는 물체의 수가 너무 많으면 완벽한 방어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일전에 암석지대를 만났을 때 선미 부분에 손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김박사 일행이 조종실에 막 들어설 때 또 한 번의 강한 충격이 있었다. 그는 쓰러질 듯 비틀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조규함 함장에게로 다가갔다. 조함장은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가 김박사를 보고는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였다. 김박사가 안전벨트를 매며 조함장에게 물었다.
"함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예상치 못한 암석지대를 만났는데 상황이 심각합니다. 승무원들 모두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쿵!' 다시 한번 선체에 강한 충격이 있었고, 우주선 내부가 크게 흔들렸다. '삐. 삐. 삐!' 경고음이 울리며 화면에 우주선 내부 구조도가 나타났다. B-8 구역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B-8 구역 회복불능의 손상발생으로 폐쇄합니다. 통로가 이어진 B-8, 9 구역 전면 통제 합니다."
자동조절시스템이 손상된 구역을 통제한다는 AI 음성이 흘러나왔다. B-8 구역이라면 바로 식량창고가 있는 곳이었다. 인간이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일. 식량창고가 타격을 입으면 정말 큰일이었다. 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하고 있지만, B-8 구역은 가장 큰 식량창고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연속되는 암석과의 충돌로 지금 당장 우주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방어 시스템이 얼마나 버텨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주선의 우중간 부분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다 그쳤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듯 크고 작은 암석들이 우주선 선체를 때리고, 그사이를 뚫고 희망호는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우주 저쪽 공간에서 태양보다 만 배는 무거운 별이 폭발하며 새롭게 생긴 블랙홀이 무서운 속도로 주변을 삼키고 있음을. 그리고 그 여파로 우주 공간에 틈이 벌어지고 있음을.
5.
"함장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우주선이 항로를 계속 이탈하고 있습니다. 좌전방으로 정체미상의 중력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한참 전부터 이것저것 화면을 바꿔가며 유심히 살펴보던 일등 항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조함장에게 보고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항로를 이탈하다니, 게다가 정체미상의 중력이라니?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인가?"
암석지대에 휘말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온신경을 집중해서 항해를 지휘하고 있던 조함장이 일등 항해사의 뜻밖의 보고를 받고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불규칙하게 날아들던 암석들이 언제부터인가 일정한 방향으로 흘렀고, 희망호가 그 사이를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폭우로 크게 불어난 강물이 하류로 세차게 흐르는 가운데, 작은 보트가 강물에 떠밀려 가면서 그곳을 벗어나기 위하여 기슭으로 비스듬하게 나아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물살이 너무 세어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하는 상황. 희망호가 딱 그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암석지대에 갇혀 헤매고 있는 희망호의 후미 우측을 거의 희망호 절반쯤 되는 크기의 암석이 강하게 타격하였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우주선이 심각한 손상을 입고 말았다. 네 개의 엔진 중 두 개가 멈췄다. 그 결과 희망호는 출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무언가의 힘이 작용하는 좌전방으로 더 빨리 말려들어 갔다.
우주공간에서 블랙홀이 회전하면서 생기는 회오리가 변형된 웜홀. 엄청난 가속력으로 시공간을 휘어버리면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잇는 통로. 그것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수도 있었고 또 오랜 시간 지속될 수도 있었다. 어떤 물체든 그곳에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어디로 갈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곳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지도. 그동안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그 웜홀이 바로 희망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희망호를 집어삼켜 버렸다.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작은 벌레. 희망호가 딱 그 꼴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어디론가 끌려가는 희망호. 희망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나마 신소재로 만들어진 우주선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과거의 우주선이었으면 벌써 박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반면에 인간은 달랐다. 우주선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속도는 인간이 전혀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속도였다. 그 속도를 인간이 버텨낼 수는 없었다. 승무원들이 하나둘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조함장 역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까무룩 해지는 기억 속에 손을 뻗어 뭔가 좌표를 입력하고 나서 그 역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희망호는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