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_대한민국 편 #24
49.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지상족 마을 사람들은 폐허로 변한 마을을 정리하고 재건축에 들어갔다. 세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무너지고 어지러워진 집터를 정비하고, 한 그룹은 그 위에 새 건축물을 올렸다. 그리고 다른 한 그룹은 농경지로 나가 농사를 지었다. 이미 봄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다시 다가 올 겨울에 먹고 살 농작물을 길러야 했다. 논밭을 다시 갈고 씨를 뿌렸다. 힘이 들었으나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모두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도구를 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한편 강변족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 남아 지상족 사람들과 함께 살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변으로 돌아가자니 이미 자신들의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또 대양족 같은 침략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한 삶을 이어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강에서 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교역하던 생활을 하던 그들로서는, 지상족과 같이 산에 정착하여 농사짓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상족을 도와 집을 짓고 농사일을 거들며 시간을 보냈다.
땅굴족 사람들은 그들대로 바빴다. 땅굴족 마을과 지상족 마을 간에 길을 닦는 대공사에 나선 것이다. 두 부족 간에 관계가 더 돈독해진 만큼 서로 왕래하기 편하고 수레로 물건을 운반할 수 있을 정도의 넓고 탄탄한 길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땅굴족 남자들이 모두 달라붙어 길을 넓히고 바닥을 고르게 다지는 일에 매달렸다. 그 작업을 하는 데는 우주항공청 지하기지에 있는 자원이 큰 힘이 되었다. 먼저 약품을 조합하여 선글라스 코팅제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수정 선글라스가 땅굴족 사람들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레이저 기술을 응용한 레이저 컷팅기를 개발하여 시력이 약한 땅굴족에 맞는 렌즈 교정까지 해주어 그들에게 신세계를 선물하였다. 해가 쨍쨍한 대낮에 그것도 한층 밝아진 시야를 선물 받은 땅굴족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낮에 밖에서 일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 재미있어 서로 앞다투어 밖에 나가 일하길 자원하였다.
라일라는 지상족 사람들과 함께 지상족 마을에 와 있었다. 땅굴족 마을에 조함장과 함께 남아있는 게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땅굴족이 본거지인 화영과 달리 그녀는 객식구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남편인 조함장이 자신을 챙겨주면 좋겠는데, 그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관계가 관계인만큼 가끔 얼굴을 부딪히게 되는 화영과도 영 어색하였다.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상족 마을을 재건하는 일에 땀을 쏟으며 잡생각을 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여 땅굴족 마을을 떠나 지상족 마을로 돌아온 그녀는 레나와 함께 사람들이 먹을 요리를 만드는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덕분에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면 잠깐 뒤척이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조함장의 땅굴족 신부 화영은 화영대로 결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함장이 돌아오고 전쟁이 끝나고 라일라가 떠나고 나서 화영은 조함장과의 오붓한 시간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못하였다. 그는 늘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무엇이 그리 할 게 많은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주항공청 지하기지에서 보냈다. 심지어 잠도 거기서 자는 날이 많았다. 때문에 화영은 남편을 지척에 두고도 독수공방 하는 날이 많았다. 그가 돌아오고 나서 처음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서 예전과 같지 않은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는 화영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은 채 거칠고 급하게 그녀의 몸을 탐하고는 바로 나가떨어졌다. 화영은 오랜만의 동침이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히 변해 있었다. 거칠고 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서 비릿한 피비린내 같은 냄새가 나는 듯했다. 대양족과 혈전을 치르면서 살육의 피냄새가 몸에 밴 것은 아닐까, 화영은 뭔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희망호 승무원들은 매일 우주항공청 지하기지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 데이터 서버에 접속하여 정보를 찾고 분석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중에서 그들이 특히 관심을 가진 건 자신들이 탔던 우주탐사선 희망호에 관한 것이었다. 우주항공청에서는 희망호의 행적을 어디까지 추적하였고, 사라진 원인에 대해서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궁금하였다.
'2166년 10월 15일. 외계신호를 파악하기 위하여 떠난 우주탐사선 희망호가 명왕성 너머 카이퍼벨트 언저리에서 블랙홀에 빠져 사라진 것으로 추정됨. 2175년 6월 우주탐사선 희망호 2를 발사하여 희망호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지점까지 탐색하였으나 행적을 찾는데 실패함. 2212년 3월 희망호가 사라진 부근에서 또다시 전해오는 동일한 외계신호를 확인함. 2215년 5월 희망호 3을 발사하여 외계신호를 추적하였으나 접선에 실패함. 2235년 8월 희망호 4를 발사하였으나 항해도중 심각한 기체결함으로 탐사를 중지하고 복귀함. 2244년 12월 성능이 대폭 향상된 희망호 5 건조 완료함. 2245년 6월 국가 간 비상사태로 희망호 발사계획 전면 보류함.'
그들이 찾아낸 희망호나 외계신호에 관련된 탐사 기록은 그러하였다. 우주항공청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추적에 나선 것이었다. 희망호 2는 사라진 희망호를 찾기 위하여, 희망호 3은 또다시 확인된 외계신호를 추적하기 위하여. 비록 희망호 4가 기체결함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희망호 5는 발사되지도 못하였지만, 우주항공청에서는 꾸준하게 탐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일련의 기록을 보면서 희망호 승무원들은 또다시 나타났다는 외계신호에 주목하였다. 자신들이 탔던 희망호가 행방불명됨과 거의 동시에 사라졌던 신호가 46년 후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 그것이 정말 외계인이 보내는 신호라면 그들은 어떤 의미로 신호를 다시 보낸 것일까? 그리고 막상 희망호 3이 근접하였을 때에는 어째서 접선에 응하지 않은 것일까?
희망호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탔던 희망호뿐만 아니라 희망호 2와 희망호 3의 항로 좌표 데이터 그리고 자신들이 추적했던 외계신호와 또다시 나타난 외계신호 데이터를 추출하여 분석에 들어갔다. 아울러 자신들이 타고 온 희망호에서 추출해 온, 블랙홀에 빠져 1800년 후의 지구에 이르기까지의 데이터도 함께 살펴보았다. 광범위한 데이터에 파묻힌 그들은 거의 지하기지에서 숙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 조함장의 관심사는 다른데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기록에 매달려 있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 거기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하세계에 있는 자원을 활용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희망호의 운항기록에 매달려 있을 때, 혼자서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설비나 원료 그리고 무기들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희망호 승무원들이 지상족 마을을 찾았다. 마을 재건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궁금하였고, 조함장은 라일라를 그리고 김박사는 레나를 만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땅굴족 남자들이 거의 모두 동원되다시피 하여 추진하였던 땅굴족 마을과 지상족 마을 간의 도로 공사가 모두 끝나, 일행은 도로 상태도 점검할 겸 비행선을 타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였다. 과거에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긴장하며 오갔던 좁고 험한 길 대신 넓고 탄탄한 길이 두 마을 간에 쭉 이어져 있었다. 한결 좋아진 길 덕분에 전에 걸렸던 시간의 절반 정도에 지상족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제 그 길을 따라 자유로운 교류가 이루어지며 두 부족 간의 결속력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하자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지상족 족장 아마라와 그의 딸 라일라 그리고 지상족과 강변족 원로들이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라일라는 오랜만에 만나는 남편 조함장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햇볕에서 일을 많이 했음인지 피부가 그을려 있었으나 오히려 건강해 보였다. 김박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레나를 찾았다. 레나 역시 많이 그을려 있었다. 그녀 역시 오랜만에 만나는 김박사를 보고 기뻐하며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한참 회포를 푼 그들은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아직 재건 작업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팔십 프로 정도는 완성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지상족 마을에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들 맛있는 음식과 과일주를 배불리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겼다. 모두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웃고 떠드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날밤 김박사는 오랜만에 레나와 잠자리에 들었다. 김박사는 레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가 비록 희망호 승무원들과 지하기지에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자신의 아내인 레나가 마을 재건에 애를 쓰고 있는데 무관심했던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레나의 태도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보통 때 같았으면 냉큼 다가와 그의 가슴에 폭 안겼을 텐데 뭔가 피하는 눈치였다. 그가 그런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손을 잡아끌자 그녀는 마지못한 듯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조심스러운 듯한 태도였다. 그가 그녀의 빰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레나, 왜 그래요? 당신 혼자 고생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한 것 같아서 화났어요?"
"아니에요. 사실은..."
그녀가 김박사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아랫배에 갖다 놓으며 얼굴을 붉혔다.
"뭐예요?"
"저... 여기에..."
레나가 말끝을 흐렸다. 김박사는 번뜩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혹시, 아기?"
"..."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그의 가슴에 폭 안겼다. 아기라니?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아랫배가 조금 부른 것도 같았다. 그는 얼떨떨하였다. 하지만 남다른 감회도 느껴졌다. 1,800년 미래로 와서 자신의 2세를 얻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남자로서 씨를 뿌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2세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레나, 고마워요. 우리 함께 잘 키워 보아요."
"여보, 사랑해요."
그가 레나를 꼭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날밤 또 다른 방에서는 조함장이 강변족 원로들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앞선 회식자리에서 강변족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조함장이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할 것을 권하였기 때문이었다. 강변족으로서는 그들이 살던 고향에 정착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으나, 대양족 같은 침략군이 언제 또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모르지만 대양족의 잔여 병력이 여전히 해안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복수를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함장이 귀향을 권유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계획을 들어봐야 했다.
"내가 해안가에 있는 대양족의 잔여 세력을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편하게 사십시오. 그리고 혹시 대양족의 침공에서 살아남은 해안족이 있다면 그들을 규합해 주십시오. 그렇게 우리들이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단단하게 뭉친다면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강변족 원로들은 조함장이 대양족 대군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힘과 능력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들을 도와준다면 자신들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을 것이었다. 조함장의 단호하고 힘 있는 말을 들은 강변족 원로들은 고개를 숙이고 감지덕지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앞으로 조함장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조함장은 강변족 원로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라일라가 있는 방으로 갔다.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한 탓에 몹시 피곤했던 라일라는 이제나 저제나 애타게 조함장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들어 있었다. 그녀 옆에 나란히 누운 조함장은 돌아누워있는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그가 하체를 밀착시키고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몸을 더듬자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보.' 그는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으며 손을 바쁘게 놀려 둘 사이의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거칠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찌륵찌륵 세차게 울어대던 풀벌레마저도 울음을 뚝 그치는 조용한 밤이었다.
(2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