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3학년 봄 내 생일날이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생일날 특식이라며 계란까지 넣어서 라면을 끓여 주셨다. 난 오랜만에 맛보는 라면을 정말 맛있게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생일이라고 특별한 생일상도 없었고 선물도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고 식구들 모두 그랬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벅찬데 생일을 챙기는 건 그냥 사치였다. 그랬기 때문에 생일날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라면 하나가 전부였다. 저녁밥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먹고 나서 친구네서 빌려온 동화책을 보고 있었다. '은호야, 아저씨가 네 생일케이크 사 왔다.' 하는 친숙한 음성과 함께 이웃에 사는 아저씨가 큼직한 상자를 들고 들어 오셨다. '케이크? 내 생일케이크라고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난 눈이 동그래졌다. 하얀 버터크림이 발린 동그란 케이크 위에 작은 집이 올려져 있고, 꽃이 핀 마당에 '해피 버스데이'라고 쓰여있었다. '은호야, 생일 축하한다. 자, 후 불어서 촛불을 꺼야지!' 아저씨가 작은 초 열개를 꼽고 불을 붙이고 나서 말씀하셨다. 아저씨 말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힘차게 '후~' 불었다. 초 열개가 단숨에 모두 꺼지고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생일 축하한다. 앞으로도 씩씩하고 예쁘게 잘 자라거라.' 하면서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일케이크라는 걸 받았다. 그것도 부모가 아닌 이웃 아저씨로부터. 어머니가 케이크를 잘라서 한 조각을 내게 건네주셨다. 생전 처음으로 맛보는 케이크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난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빵이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아저씨는 평소에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어른들께 인사 잘하고 싹싹하고 똑똑하다고. 그리고 아저씨 하고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바로 장기 맞수. 처음에는 아저씨 하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날이 갈수록 내 승률이 올라갔다. 마와 포를 잘 쓰는 나는 나만의 필살기가 있었다. 그래서 내 나름 치밀하게 계획한 공격에 수동적으로 방어하다 보면 상대방이 외통수에 걸렸다. 아저씨가 한수만 물러달라고 사정하였지만, 한수만 무른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어린 나에게 장기에 지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도전하였지만 번번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결국 '내가 졌다. 이제 앞으로는 널 이기기 힘들겠다.'하고 인정하셨다. 그러면서도 아저씨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동네 아저씨들 어깨너머로 장기를 배웠다. 그리고는 아저씨들이 장기 상대가 없을 때 내가 상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나를 가르치는 입장이었지만, 아저씨들은 고인 물 나는 흐르는 물이었다. 실전이 거듭될수록 내 실력은 부쩍부쩍 늘었고 곧 아저씨들과 대등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면서 아저씨들이 서로 나와 장기를 두겠다고 결투 신청을 하셨다. 그리고 내 실력은 그에 비례하여 향상되었다. 생일케이크를 사 온 아저씨는 가장 고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내가 다른 아저씨들을 모두 꺾고 아저씨만 남게 되자 비로소 결투를 받아 주셨다. 어린아이라고 방심했을까? 첫판에 그만 내가 이기고 말았다. 아저씨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틈만 나면 나와 장기 혈투를 벌였다. 그러면서 아저씨와 정말 친해지게 되었고, 아저씨는 나를 친조카처럼 귀여워해 주셨다.
국민학교 4학년말 집이 부산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5학년부터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는 서울에서 온 아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로부터 주목을 많이 받았다. 내 말투가 이상하다고 어설프게 따라 하면서 놀리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나무라셨다. '너희들이 은호 말투를 놀릴 게 아니고 오히려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국어시간과 도덕시간에 꼭 나더러 교과서를 읽으라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투를 놀리는 아이가 싹 없어졌고, 다들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학교를 옮기고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하였지만 별 탈 없이 다닌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가출하기도 하였고 집안에 다른 복잡한 사정들이 생겨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집에 찾아오셨다. 선생님이 어머니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나는 직접 듣지를 못하였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 널 꼭 공부시키라고 말씀하시더구나. 가정형편이 힘들더라도 넌 꼭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가거라. 내가 넌 꼭 공부시키마.' 아마 그때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급전으로 빌린 내 중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을 아버지가 노름으로 다 날렸음에도, 기어코 다시 급전을 빌려 나를 중학교에 보내게 된 계기가.
그러고 보면 나는 선생님들을 한결같이 정말 잘 만난 것 같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정말 나를 예뻐하셨고, 3학년 때는 선생님이 당신 아들과 함께 놀도록 하면서 단팥빵 등 간식도 먹이고 학용품도 듬뿍 챙겨 주셨다. 4학년 때는 선생님이 어려운 가정형편을 아시고 육성회비 면제에 교과서도 무상으로 주시고, 빵과 우유도 무상급식을 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촌지가 관행이어서 촌지를 줄 형편이 못 되는 집 아이들은 푸대접받기가 일쑤였는데,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정통신표에는 '두뇌 명석하고 예의 바른 모범생'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녔다.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진로를 걱정하여 상고로 진학하도록 길을 안내해 주신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 학급 반장과 특활반 반장을 맡기면서 나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화려한 고교생활을 선물해 주신 고등학교 1, 2학년 담임선생님 등. 정말 모든 선생님들이 나에게 은인 같은 분들이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가족여행이란 걸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단 하루 가족나들이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냥 먹고살기 바빴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되었다. 부산에 이사 온 지 팔 개월이 되었지만 바다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 부산이 항구도시라고 하는데 바다가 어떻게 생긴 건지를 몰랐다. 세 들어 사는 집주인아저씨가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셨다. 인자하신 사모님과 2남 3녀 자녀가 있었다. 넷째가 딸이었는데 나와 나이가 같았고, 다섯째는 두 살 어린 남자아이였다.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가족이 송정해수욕장에 피서 가는데 은호 데리고 갔다 올게요.' 그렇게 해서 나는 생전처음 남의 식구에 끼어 가족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생전 처음으로 바다구경도 할 수 있었다.
주인집 넷째는 완전 왈가닥이었다. 거의 선머슴으로 여자아이들보다 남자아이들과 더 잘 어울렸다. 때문에 나하고도 잘 어울려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여름이면 남자애들과 똑같이 햇볕에 잔뜩 타 검은 피부에 까만 눈이 반짝거렸다. 장난도 잘 쳤다. 손도 매워서 장난으로라도 한 대 맞으면 얼얼하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해수욕장에서는 완전 의외였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내 눈치를 보면서 수영복 입은 몸을 자꾸 가리는 것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 모습이 우스워 빤히 쳐다보며 '볼 것도 없는데 뭘 그리 감추니?' 한마디 했더니 얼굴이 빨개져 도망가 버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생전처음 보는 바다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파란 바다에 파란 하늘이 이어져 있고, 그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고. 백사장에는 파도가 연이어 밀려왔다 밀려가고.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덥고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고. 이게 바다라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그런 느낌도 잠시, 한가하게 감상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집 형, 동생과 함께 아저씨가 빌려 주신 커다란 고무튜브를 끌고 바닷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파도를 타며 신나게 놀았다. 한참을 놀다 나오니 아주머니가 파라솔이 펴진 평상 위에 싸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김밥에 잡채에 각종 전에 없는 게 없었다. 안 그래도 허기진 배에 완전 꿀맛이었다. 아주머니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며 사이다를 따라 주셨다. 그렇게 놀다가 먹다가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서산에 걸렸다. 아쉽지만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 돌아올 때는 동해남부선 기차를 타고 부전역까지 와서 택시를 탔다. 그날밤 피곤에 지쳐 잠자리에 누우니 여전히 고무튜브를 타고 바닷물에 떠있는 것처럼 몸이 흔들흔들 흔들거렸다. 게다가 시뻘겋게 탄 등이 따가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주인집 넷째는 함께 해수욕장에 다녀온 후 한결 부드러워졌다. 바지대신 치마를 자주 입었고 선머슴아 티를 조금씩 벗었다. 그와 더불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전에는 마치 쌈닭처럼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뭔가 힘이 풀린 듯했다. 나는 변해버린 그 모습이 어색해 전과 같이 만만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관계가 점점 서먹해졌고, 어머니가 다시 가출한 이후 집이 이사하는 바람에 헤어지고 나서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같은 동네에 아버지 사촌 여동생, 나와는 오촌인 당고모가 살고 계셨다. 고모부는 철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이셨고, 나와 동갑인 딸 그리고 세 살 아래인 아들이 있었다. 고모는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셨는데 솜씨가 좋아 한복도 직접 만드셨다. 공무원 월급이 워낙 박봉인지라 고모 수입이 가게에 큰 보탬이 되었다. 고모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은호가 부모를 잘 만났으면 잘 될 아인데, 나도 형편이 그래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하면서 안타까워하셨다. 고모는 나에게 육촌 동생 공부를 봐달라며 집으로 자주 오라고 하셨다. 국민학교 5학년이 국민학교 2학년 과외라니, 그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렇게 하였다. 말이 과외지 산수 숙제나 도와주고 나머지는 그냥 같이 놀았다.
고모댁에 갈 때마다 거기서 저녁을 먹었다. 고모는 생선도 자주 굽고 계란프라이도 하고 밥도 잔뜩 담아 주셨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땐 가끔 말린 생선이나 옥수수 고구마 등을 싸주시기도 하고 용돈도 주셨다. 그렇게 잘해주시는 고모를 나도 잘 따랐고, 고모댁에 자주 들렀다. 중학교 들어 시험기간 중에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와 공부할 분위기가 안되면 아예 고모댁으로 가서 밤늦도록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에게 잘해주셨던 고모는 50대 후반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고모같이 좋은 분을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는지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살맛 나는 세상은 중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