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xx님! 채이서님! 식사요!"
아침 식사가 왔음을 알리는 식당 아주머니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에 곤히 자고 있던 김부장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차렸을 때 즈음엔 이미 식당 아주머니는 식판만 남기고 떠난 뒤였다. 그의 발치에 덩그러니 놓인 식판만이 방금 그를 깨운 사람이 식당 아주머니였음을 알려준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7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왜 이리 늦잠을 잔 거지?'
김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늦잠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가리지 않고 5시만 되면 깨는 김부장에게 오늘은 참으로 이상한 날이다. 그냥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것으로 치고 김부장은 식판을 그의 테이블로 옮긴 후 꾸역꾸역 밥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 뜨자마자 먹는 밥이라 밥맛이 없을 만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식욕은 왕성했다. 깨끗이 비워낸 식판을 복도에 내놓으려는데 옆자리를 보니 채이서의 식판은 아까 그대로이다. 꼼짝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고 있는 채이서를 깨워서 식기 전에 어서 들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김부장은 원래 남에 일에 참견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 로비로 향했다.
로비에는 커피 자판기가 하나 있었다. 그 옆에는 앙상하고 낡은 의자 두 개와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김부장은 커피 한잔을 뽑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딱딱한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의자는 곧 부서질 것처럼 삐그덕하는 소리가 났다. 기분 나쁜 소리가 나는 불편한 의자였지만 그래도 잠시 쉬어갈 정도는 된다. 의자에 앉으니 창문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누구라도 좋아할 만큼 맑고 파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하지만, 김부장은 맑고 파란 하늘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온전히 저 하늘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혜택이다. 이 우중충한 곳에 갇힌 김부장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만일 젊은 한쌍의 연인이 있다면 그들에게 저 하늘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것이다. 따스하고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살은 두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 것이고,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 파란 하늘은 오직 그런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김부장은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하늘마저 공평하지 못한 존재라니. 차라리 비라도 쏟아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채이서는?'
김부장은 문득 어제부터 채이서의 깨어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저녁은 먹고 자는 건가? 설마 뒤진 건 아니겠지?'
'근데 내가 왜 그 녀석 걱정을 하고 있담?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낸 놈한테.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은 도대체 얼마나 빨리 잠이 든 거야? 저녁 먹고 간호사가 가져다준 알약 하나를 먹었을 뿐인데, 채이서가 돌아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단 말인가?
그때 김부장은 등 뒤의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눈에 보아도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거 좀 앉아도 괜찮겠소?"
노인의 탁성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걸걸했다. 김부장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임상시험 참가자가 분명했다.
"네, 그럼요. 여기 앉으세요"
김부장은 마침 적적하던 차에 말동무가 나타나서 반가웠다. 그게 저 노인일지라도.
"그쪽은 몇 호신가?"
"전 404호에 있습니다."
"아 그러신가. 난 408호일세."
'404호!'
순간 김부장은 자신이 머무는 이 방 번호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남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깨달았다. 꼭 자신의 명함 같았다. 여기서는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 아니라 '404호 아저씨'이다. 저 할아버지는 '408호 할아버지'이다. 김부장은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건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404호는 408호보다 우월하지 않다. 408호는 404호를 부러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사를 한다. 여기서 5일을 머문다면 누구나 똑같은 3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김부장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점을 찾아냈다.
김부장이 혼자 딴생각을 하는 사이, 노인은 혼잣말을 시작했다.
"근데 이번에 우리 아들이 좀 좋은 일이 생겼나 봐. 원래 어릴 때부터 착하고 공부도 잘했었거든..."
김부장은 노인의 아들 자랑이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일단 좀 들어보기로 했다.
"그 녀석이 엄마 아빠한테도 참 잘해. 근데 이번에는 좀 좋은 일이 있었나 봐."
"어르신 어떤 좋은 일요?"
"어 그게 좋은 일인데. 자세한 건 말을 안 해. 아무튼 좋은 일 이래. 근데 돈이 좀 필요한가 봐. 근데 또 마침맞게 여기서 전화가 왔지 뭐야. 하느님이 도왔어. 내가 평소에 우리 아들 잘 되라고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를 드렸었거든."
노인은 창문 밖에 하느님이 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우리 아들이 해외여행 한번 가자고 하던데... 아저씨도 해외여행 가봤나?"
"저도 몇 번...."
해외여행? 해외에 나가본 적은 있지만 사실 회사 출장 때문에 나갔다가 잠시 비는 시간에 몇 군데 둘러본 게 다인데, 이것도 여행이라고 해야 하나? 김부장은 자초지종을 말하기가 귀찮아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근데 아저씨는 여기를 어떻게 알고 오셨나? 아니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우리야 여기서 돈만 잘 받아가면 되지. 안 그런가? 아무튼 이번 일만 잘 되면 이제 걱정이 없어."
김부장은 이 노인과의 대화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이 노인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방에 돌아가서 채이서의 푸념을 듣고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김XX님 맞으시죠?"
그때 뒤에서 다가온 간호사가 김부장의 이름을 불렀다. 간호사의 한 손에는 알약 하나가 들려있었고, 다른 손에는 스케줄표가 적힌 종이가 들려있었다.
"김XX님, 한참 찾았네요. 여기 약 드시고요. 오늘도 어제처럼 채혈하시는 곳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오늘은 오후에는 인터뷰가 있으니깐, 3시 정각에 202호로 가세요."
김부장은 간호사 덕에 408호 할아버지와의 지루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을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다시 404호로 돌아갔다.
정확히 3시 정각, 김부장은 상담실 202호의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김부장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작은 창문이 있었지만,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려서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환하게 켜놓은 실내등 덕분에 안은 전혀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크지 않은 방이었지만, 안에 가구라고는 작은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였기 때문에 방은 꽤 넓게 느껴졌다.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시죠?"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기 생활이 답답하시지는 않으세요? 좀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양해 부탁드릴게요. 그나저나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시죠?"
"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네요."
"어떻게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오늘 기분?'
김부장은 불쑥 들어온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글세요. 오늘 기분은 잘 모르겠는데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 같아요."
"네 그러실 수 있죠. 그럼 평소의 기분은 어떠세요?"
"평소요? 글세요. 요즘에는 특별히 좋은 일은 없어서,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일도 없어서 그냥 그런 상태인데요."
"그렇군요. 그럼 김XX님은 어떤 경우에 행복한 감정을 느끼세요?"
"행복한 거요? 그냥... 뭐 가끔 TV에서 재밌는 거 볼 때 행복하지 않나요?"
"그래요? 최근에 재밌게 보신 TV프로가 뭐였죠?"
김부장은 한참을 생각했지만, 그가 재밌게 본 TV프로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 적막함이 싫어서 TV를 켜놓고 있을 때는 많았지만, 재밌게 본 것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글세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네, TV를 그렇게 좋아하시지는 않나 봐요."
"네, 그런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