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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Oct 04. 2022

기억주사 #8. 낯선 천장

김부장에게 '혼밥'이란 언제부턴가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집에서는 당연히 혼자이고, 회사에서도 그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가 휴가라도 쓰는 날에는 영락없이 혼밥 신세이다. 혼밥이 무슨 죄는 아니지만 혼밥을 할 때면 왠지 모르게 숨고 싶어 진다. 그래서 아무의 시선도 닿지 않을 만한 구석자리에서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빨리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허기만 채울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그의 식사의 이유였다.

12시 정각.

김부장은 매우 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허기이다. 이 허기의 이유를 김부장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이건 그의 생존본능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보낸 3시간은 그의 잠재된 생존본능을 자극했다. 모든 상황들은 그를 매우 피로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상태였다. 심장은 평소보다 2배는 빨리 뛰었고, 모든 감각은 예민하게 살아났다.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의 본능은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강력한 본능의 지배를 받아 김부장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식욕을 느끼고 있었다.


"덜컹!"

밥을 실은 대차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소리만으로도 김부장은 식사가 도착했음을 알아차렸다. 김부장은 급히 침대에 달린 간이 테이블을 꺼내고 식사를 기다렸다. 그의 예민해진 후각은 점점 진하게 느껴지는 음식 냄새를 통해 대차가 한 칸, 한 칸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김XX님, 채이서님"

그렇게 김부장의 인내심이 극에 달할 무렵 힘이 무척 세 보이는 아주머니가 식판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간단히 이름을 한번 호명한 뒤 침대 끄트머리에 놓고 간 식판을 김부장은 자신의 테이블로 옮기며 메뉴를 확인했다. 하얀 쌀밥 한 공기와 짭짤하게 간이 밴 생선 한토막, 무 두세 조각이 떠다니는 멀건 국과 나물무침, 배추김치가 전부였다. 김부장이 어릴 적 먹었던 나물무침에는 항상 입맛을 돋우는 깨가 솔솔 뿌려져 있었지만, 여기서 그런 정성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부장의 강렬한 식욕은 그런 것들을 가리지 않고 5분도 안되서 깨끗이 식판을 비워냈다.




오후 시간은 매우 무료했다.

점심을 먹고 대기하는 동안 간호사는 3번이나 병실에 다녀갔다. 처음 왔을 때는 언제 주사를 맞으러 내려갈지 모르니 방에서 대기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니만, 그다음에는 태연한 얼굴로 들어와서 천천히 혈압만 재고 사라졌다. 다음에 체온을 재러 다시 왔을 때, 김부장은 도대체 언제 내려가는 거냐고 간호사를 채근했지만, 그건 자기 소관이 아니니 더 이상 묻지 말라했다. 어이없고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돈 받고 하는 일이니 이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어쩌겠냐고 김부장은 생각했다.


그런데 채이서는,


"아저씨, 근데 여기 진짜 '꿀'아니에요? 이렇게 자빠져서 먹고 자고 싸기만 하면 300만 원을 준다니..."

몇 시간 전만 해도 불만과 의심을 쏟아내다가, 갑자기 임상시험 예찬론자로 돌변해 있었다.


"아 근데 여기 와이파이는 정말 안 되는 건가요? 나 아제 데이터 얼마 안 남았는데..."

김부장은 채이서가 혼자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묻는 말인지 헷갈려서, 대꾸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불쑥 간호사가 들어왔다.


"김XX님. 10분 뒤에 2층으로 내려오세요."

좀 전까지 자기 소관이 아니라던 그 간호사는 김부장에게 이 말을 전달한 뒤 얼른 방을 나갔다.




주사실은 2층 복도 가장 끝에 있는 방이었다. 김부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려왔을 때, 오전과는 달리 직원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김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부장을 주사실로 안내했다. 아까 들렀던 채혈실이나 지나오며 곁눈질로 훔쳐본 다른 방들에 비하면 훨씬 크고 추운 방이었다. 확실히 추웠다. 그건 김부장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싸늘한 공기가 김부장의 팔에 닿았을 때, 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팔짱을 끼었다. 


"저기 위에 침대 위로 올라가서 머리는 아래쪽을 보고 누워주세요."


김부장을 이곳으로 인도한 남자는 방 한가운데 있는 수술대를 가리키며 그걸 '침대'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침대는 머리를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딱 사람 머리 크기만 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김부장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가운데에는 김부장이 누워야 할 수술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사용법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계 하나가 있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5명의 사람들은 모두 벽을 보고 서서 무언가를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김부장은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건지 궁금했지만, 그들의 얼굴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이미 머리를 바닥을 향한 채 수술대 위에 누워버렸기 때문이다.


"성함 한번 말씀해주세요."


김부장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여기까지 안내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마 좀전까지 뒤돌아서서 무언가를 준비하던 사람들 중의 한명일 것이다. 김부장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네, 그럼 수면 마취 시작할게요."

김부장은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자의 생김새가 몹시 궁금했지만, 그런 사소한 호기심 따위는 접고 천천히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김부장의 의식은 천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오후 5시.

길게 드리운 햇살이 커튼을 비집고 들어와 김부장의 눈꺼풀 위로 쏟아져내렸다. 볕의 온기를 느낀 김부장의 눈꺼풀은 미묘하게 떨리다가 어느 순간 활짝 뒤집어졌다. 김부장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가만히 낯선 천장을 응시보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몸 위로 담요가 발끝까지 차분하게 덮여있었고, 침대 옆에는 아까 신고 내려갔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항상 비스듬히 누워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김부장이지만 지금 그는 머리를 반듯이 천장을 향한 채 누워있었다. 아마도 1차 접종을 끝내고 누군가에 의해 이 방으로 그는 옮겨진 것이 틀림없다. 김부장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훑어보았다. 고요한 방 안. 옆 침대에는 채이서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도 접종을 마치고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김부장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뒤통수 바로 아래 부드럽게 파인 골짜기 사이에서 좀 전까지만 해도 없던 반창고 하나를 찾아냈다. 


"휴~"

김부장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1차 접종을 마쳤다고 확신한 순간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내뿜어져 나왔다. 김부장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몸을 천천히 움직여보았지만, 통증이 있거나 하는 곳은 없었다. 다만 한동안 목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뒷목이 좀 뻐근했다. 그는 그런 뒷목을 스트레칭하기 위해 목을 뒤로 한껏 젖혔다. 그리고 좀 전에 바라보았던 천장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다시 보아도 낯선 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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