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시험센터에서의 하루는 길고도 지루하다. 특히 오늘처럼 주사를 맞고 다음 날은 잠시 이어지는 인터뷰와 채혈, 채뇨 말고는 아무런 일정이 없기 때문에 그저 양계장의 닭들처럼 모이주는 시간만 기다릴 뿐이다. 모이를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 외의 시간은 거의 대부분 침대에 누워서 보낸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연결된 또 다른 세상 속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또 모이가 나오고 먹고 싸고 또 핸드폰 보고, 그러다가 자고 이게 바로 임상시험센터에서의 하루이다. 간혹 이 다람쥐 쳇바퀴 같은 패턴이 지겨워져서 복도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일은 아주 가끔 벌어졌기 때문에 복도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다른 입소자들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김부장과 채이서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 지난 3일간 그들도 똑같은 패턴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잠에서 깨자마자 채이서는 득달같이 김부장의 침대로 건너와 말을 건넸다.
"아저씨, 어젯밤에는 뭐 없었어요?"
"어, 그러게 어제는 그냥 잠만 잔 거 같은데..."
"아이씨~ 잘 좀 생각해 봐요. 혹시 까먹은 거 아니에요? 이거 중요한 문제라고요."
"아 그래 혹시 떠오르면 바로 이야기해 줄게. 근데 넌? 너는 별로 이상한 거 없어?"
"글세요. 전 심각하게 건강한데요. 여기 오니깐 평소에 아픈 곳도 다 낫는 것 같아요. 잠도 잘 자고요. 전 정말 임상시험이 체질인가 봐요."
'이런 답답한 감옥 같은 곳에서 지내는 게 체질이라니. 쯔즛 이 녀석은 교도소에 들어가서도 좋다고 하며 잘 먹고 잘 살 놈이다. 이런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내가 내는 세금을 좀먹고 있는 거지. 덕분에 수십 년을 뼈 빠지게 일해도 난 아직도 이 모양인 게고.'
김부장은 남 등이나 처먹을 생각이나 하면서 임상시험센터의 공짜밥으로 호위호식하는 채이서가 얄밉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좀 얄미운 정도가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살을 파먹는 기생충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별 볼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채이서는 냉큼 자기 침대로 돌아가 식판 위의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볼썽사나운지 김 부장의 눈썹 사이에는 자그마한 주름이 두 개 정도 생겼다.
그나저나 김부장은 이 놈의 하루가 지겨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래도 오전에는 핸드폰으로 남들이 사는 세상을 훔쳐보고 복도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오후가 되자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김부장은 미치도록 더디게만 흘러가는 시간의 숨통을 조여서라도 빨리 하루를 마치고 싶었지만, 그에게 그런 권능 한 힘 따위는 없었다. 단지 무력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부장은 온몸에 힘을 뺀 채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걸어 다녔다. 분명 저 문들 너머에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작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각자만의 세상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공허히 복도를 맴돌다 로비에 있는 허름한 의자에 잠시 몸을 기대기로 했다. 이곳에서 잠시 평온함을 느끼며 시간을 때울 요량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대와 달리 채 5분도 되지 않아 지루함만이 김부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뭔가 흥미로운 일을 찾는 그의 헛된 노력이 그의 시선을 하늘 위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태양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태양은 그야말로 '유아독존'의 격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공허한 하늘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빛은 또 얼마나 강렬한지 태양을 마주한 순간, 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 태양을 피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 후에야 희미하게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온전히 태양의 모습을 마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건 김부장이 미약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태양 앞에서는 그러하다. 누구도 태양을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볼 수는 없다. 아마 그런 짓을 하는 미친 자가 있다면 그는 곧바로 실명을 해버릴 것이다. 그건 그냥 어리석은 짓일 뿐이고, 김부장도 그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 순간 김부장은 지금 이 순간이 어제 꿈에서 본모습의 데자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뜨는 태양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너무 오버스러운 생각일 수도 있지만, 사실 매일 뜨는 태양이라 해도 그 모습과 형태 그리고 강렬함까지 똑같기는 힘들다. 태양의 모습은 사실 계절마다 다르고 시간 마다도 다르다. 그러니 일 년 중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태양의 빛이라는 게 지구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통해서만 넘어오니 그때그때 날씨 따라 다르고, 공기 중의 미묘한 습도, 먼지의 양에 따라서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 태양은 어제 꿈속에 나왔던 그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형태도, 온도도, 막연하게 느껴지는 기운도. 이게 단지 우연일까? 김부장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좀 더 오래 그리고 자세히 저 태양을 느끼고 싶어졌다. 김부장은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의자에 널어놓은 빨랫감처럼 김부장은 완전히 힘을 뺀 채 의자에 눕다시피 한 자세로 태양을 음미했다.
두 눈은 감았지만 눈꺼풀을 뚫고 태양의 강렬한 빛이 전해졌다. 김 부장 앞에는 붉은빛이 이글거렸다. 태양과 맞닿은 피부에는 미묘한 열기의 변화가 느껴졌다. 하지만 어제의 태양처럼 그를 산화시킬 정도의 강렬함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열기로 인해 어느 순간 두 뺨에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느껴졌다. 김부장은 가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눈을 떴다.
'꿈은 무슨...'
김부장은 스스로의 부질없는 망상과 행동에 실망했다. 그가 느낀 태양은 그를 태워버릴 만큼 강렬하지도 고통 뒤에 형용할 수 없는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줄 만큼 따사롭지도 않았다. 그저 한여름밤의 모기처럼 그의 피부 한 조각에 가려움만을 남겼을 뿐이다. 김부장의 태양을 향한 호기심은 사그라들었고, 그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침대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이다.
오랜만에 환자복을 벗고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은 김부장의 감회는 새로웠다. 이곳에서의 낯선 기억은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기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김부장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채이서의 이름을 불렀다.
"이서야.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도 잘 지내."
"아저씨, 저랑 약속한 거 잊은 건 아니죠? 제가 아저씨 핸드폰에 제 이름으로 전화번호 저장해 놨으니깐, 꿈 하고 관련된 것들 중에 뭐라도 생각나거나, 혹시 또 꿈을 꾸게 되면 꼭 연락 주셔야 돼요! 아셨죠?"
끝까지 꿈을 가지고 채근하는 채이서가 귀찮아서라도 김부장은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김부장은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임상시험센터에서의 마지막 코스는 처음 들어왔던 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마지막 안내사항을 듣는 것이다.
"이제 집으로 가실 시간이네요. 그래도 아직 완전히 임상시험이 종료된 것은 아니고요. 앞으로 1달간은 경과를 관찰할 거예요. 1주일에 한 번씩 처음에 오셨던 저희 센터로 오셔서 인터뷰하고 여기서에서 하신 것처럼 간단하게 채뇨, 채혈 검사만 진행하면 돼요."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중간에 퇴소하신 분은 없었나요? 아니면 혹시 이상 증상을 호소하셨던 분이리던지, 좀 이상한 꿈을 꾼다거나 뭐 그런 일로..."
"네,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죠. 저희 주사는 매우 안전하답니다. 이미 다른 실험을 통해서 저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했죠. 그러니깐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 한 달간 추적관리하는 부분도 통상적인 절차라고 이해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