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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May 11. 2024

감정의 세계 #1

Prologue

난 '기쁨' 이다.


사람들은 보통 날 추상적인 개념일 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난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나는 일정의 질량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매우 비싼 현미경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운좋게 나를 발견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겉모습만 보고 내가 '기쁨'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겠지. 사실 내 겉모습은 구역질이 날만큼 추하거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엄연히 이 세상의 존재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우리같은 존재들도 모든 물리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바람이 불면 공기의 흐름을 따라 날아오르고, 거대한 물쌀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평온한 날에는 땅에 살포시 가라앉아 조용히 몸을 숨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공기나 물 속에 있을 때는 아무 의미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갈수만 있다면 우리는 매우 소중한 존재가 된다. 왜냐면 난 '기쁨'이니깐. 인간들은 우리가 그들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축복'같은 일이라 여길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매우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일이라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귀한 사건은 아니다. 우리는 지천에 깔려있고, 우리는 매우 작은 존재여서 인간의 몸에 있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인간에게 축복같은 일이 나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난의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도 인간처럼 먹고, 자라고, 번식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자고, 아기들을 잘 키울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하다. 인간의 몸 중에서 우리가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은 바로 '대장'이다. 하지만 그 곳까지 가는 길은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빠르게 대장까지 가는 방법은 가까운 혈관으로 이동해서 적혈구에 올라타는 것이다. 하지만 초속 150cm로 이동하는 적혈구에 올라타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초속 150cm가 별거 아니겠지만, 난 땀구멍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을만큼 작은 존재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초속 150cm로 이동하는 적혈구에 올라타는 것은 공중에서 뛰어내려 초음속 제트기에 올라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에 성공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백혈구에 눈의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몸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순식간에 온몸에 싸이렌이 울려퍼지고 삽시간에 백혈구들이 총출동하여 우리를 에워싼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 따위는 없다. 오로지 파괴하고 상대를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들이다. 상대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두려움조차 없다. 그러니 우리처럼 미미한 존재들은 그들에게 걸리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 그들과 맞설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적혈구에 일단 올라타면 바싹 몸을 붙이고,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대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이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면, 그곳에는 분명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은 지상 낙원이다. 1년 365일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고, 온갖 영양분들이 가득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지만 이 곳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동지들을 잃었다. 아주 소수의 동지들만이 이곳에 도착했고, 우리는 종족의 번영을 위해 다시 번식하고 융성해야 한다. 우리가 이 곳에서 번성할 수 있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왜냐면 나는 '기쁨'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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