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약속

서로를 지켜낸 시간

by 흉터쿠키

아득한 꿈처럼 환하게 웃는 당신을 떠올린다.

가만히 무거운 눈꺼풀을 일으키자 단꿈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부터 어질러진 자리를 가장 빠르게 정리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왜 그게 나여야 했는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엄마의 상태를 정확히 알기 위해 전원 할 병원을 찾아다녔다.

갑상선암의 재발, 그리고 새롭게 발견된 유방암.
하지만 전이가 아닌 ‘각자 원발’이라는 말에 안도를 해야 했다.
암의 유무가 아닌 전이냐 원발이냐에 안도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고,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첫 번째 항해였다.




치료가 있는 날이면 엄마가 치료를 받는 동안 복도 의자에 앉아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노트북을 펴 밀린 일을 처리하다 잠깐씩 눈을 붙였다.

치료가 없는 날엔 출퇴근을 하고, 육아를 하고, 또 동시에 이혼 소송을 준비했다.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도 법 앞에서 공정함을 내세워 이 세상 모든 이유를 꺼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시간이 날 때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딘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엄마는 종종 함께 나서 주기도 했다.
묻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옆을 지켜주었다.

엄마와 딸을 바라볼 때면 자책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나는 살아내야 했다.
나는 꽤나 불안했고, 그토록 나약한 내 모습이 싫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오히려 그런 나를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엄마이자 딸’로 기억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조금씩 버텼다.

우리는 서로가 가장 별로라고 느껴지던 순간에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온전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국 곁을 지켜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이어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오래된 약속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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