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9일 수요일
로포텐으로 가는 길
로포텐 제도로 들어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번에 이브네스Evenes나 스볼베르Svolvaer 또는 레크네스Leknes공항을 이용하는 빠르지만 비싼 방법과 보되Bodø에서 내려 카 페리를 타고 들어가는 비교적 느리고 저렴한 방법. 우리는 물론 후자를 택했다. 저녁 도착이어서 첫날밤을 보내고 들어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마침 새벽 한 시에 보되항을 떠나는 페리가 있단다. 생각만 해도 골이 뻑적지근 해지는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애매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느니 알뜰히 이동에 올인하는 편이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착장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그러나 우선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캠핑용 가스부터 구해야 한다. 출발 당일 새벽까지 열심히 짠 계획에 따르면 우리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마트가 문을 열기 전인 이른 아침 바로 산에 오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침에 집을 나서며 급히 입에 넣은 토스트 이후로는 전혀 먹은 게 없었기 때문에 무척 허기가 졌다. 기내에서 물 한잔 조차 얻어먹을 수 없었던 현재의 상황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페리를 기다리며 대기실 근처에서 물이라도 끓여, 챙겨 온 건조 식량을 먹기로 했다. 건조 식량은 수분을 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묵직했기 때문에 얼른 먹어치워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보자는 심산이었다.
우선 구글맵을 켜 몇 번이고 걸어갈 방향을 눈으로 따라가 보며 길을 익히려 애썼다.
가자! 가보자!!!
한밤중 낯선 곳에 뚝 떨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피어오르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떨치고자 괜히 기합소리를 넣듯 크게 외치며 마침내 건물을 빠져나왔다. 얼굴에 부딪는 차가운 공기에 눈을 좀 더 또렷이 뜨며 걸음을 뗐다. 밖은 어느새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아 거리의 가로등만 고요히 주황빛을 밝히고 있었다. 공항 앞 큰 도로를 건너고 나니 곧장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타났다. 보도 양 옆으로는 파스텔 톤 주택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시내와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었다. 삼각지붕에 아래 네모난 창이 두 개, 아담한 앞 뜰을 뒤덮은 초록 잔디와 그를 둘러싼 하얀 울타리. 어릴 적 "집을 그려보세요"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려냈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집들이 바로 여기 있었다. 매일 창문을 박박 닦아야 하는 법이라도 있는 양 투명한 유리를 통해 집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는데 우리는 그 길을 걷는 내내 감탄을 금지 못했다.
'아니, 노르웨이 사람들은 꾸미기 천재들인가?'
창틀에 정갈하게 놓인 자그마한 사물들이나 벽에 액자를 나열한 솜씨, 매단 조명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소심한 우리는 겨우 흘낏거릴 뿐이었다. 아니, 그런데 정말, 울타리 너머에 서서도 같이 그 집 넷플릭스를 시청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다 들여다 보였다고...
어딘가 분명 잘못된 것 같단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불편한 어깨끈을 계속해서 고쳐매며 '레마1000'이란 마트를 찾아 들어갔다. 그 시각 이미 오랜 비행과 허기짐에 기진맥진한 우리는 ‘가스’는 잠시 잊은 채, 의식의 흐름대로 진열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한국인이 만들었다던 말로만 듣던 그 미스터리 라면이다!
아 캐비어 크림 여기 엄청 많이 파네!
이것 봐 식빵 자르는 기곈가봐! 어떤 맥주 마셔볼래?
한참 넋을 놓고 돌아보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가스가 있을만한 복도를 살펴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역시 팔지 않는단다. 앞서 잠시 들렸던 마트에도 캠핑용 가스는 없었기 때문에 힘이 쭉 빠졌다. 일단 맥주라도 한 캔씩 사서 마시고 힘내자 싶어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웅얼웅얼 말을 걸었다.
…. we don’t sell beer….
..... 우리 맥주 안 팔아.....
맥주를 팔지 않는다고? 아니 그럼 왜 맥주를 저리 산처럼 쌓아둔 거지? 세상이 우리를 놀리는 건가 싶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why? then why there are so many beers? why?
왜? 그럼 저기 맥주 왜 있는 거야? 대체 왜?
-sorry, it is just the rule..
미안 그게 그냥 법이야
-??????
당황해 버벅거렸던 영어 탓인지 한참 불통 대화를 나누다 알고 보니 노르웨이에서는 평일 밤 8시 이후에는 주류 판매가 금지되어 있단다. 토요일엔 저녁 6시 이후 금지이고. 또 한 번 힘이 쭉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결국 안주로 먹으려던 대구 알 크림 튜브와 크래커, 대구포, 고등어 통조림만 담긴 봉지를 덜렁 들고 터벅터벅 밖으로 나왔다. 꼬르륵.